상세보기

명칭 최동제(崔東濟)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668(현종 9)∼1743(영조 19)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군즙(君楫), 호는 만오재(晩悟齋)이다. 서울에서 보은 금적산 아래로 이거해 온 계당(溪堂) 최흥림(崔興霖)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최진해(崔鎭海), 아버지는 호조참판에 증직된 최두홍(崔斗洪),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호군(護軍) 이치중(李致中)의 딸이다. 삼승면 선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4세의 나이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이름이 드러났고, 20세 이전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1696년(숙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박사를 거쳐 1702년(숙종 28) 대정현감(大靜縣監)이 되었다. 현감 재직 중 음사(淫詞)의 폐단을 엄단 풍속의 교화에 힘썼으며 후에 교리(校理)에 올랐다. 이어 고원(高原)․용안(龍安) 등의 현감을 지냈으며, 1728년 이인좌의 난 때는 행장을 재촉하여 서울에 이르렀으나 역도가 이미 평정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730년(영조 6)에 다시 신창현감(新昌縣監)이 되어 고질적인 고을의 악습을 혁파하여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1731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집에 만오(晩悟)라 써 붙이고 청렴하게 살았다. 당시의 시중 홍계유는 “최모(최동제)의 재략(才略)이 단지 백리의 고을에만 펼쳐지니 애석하다.”라고 하였고, 영의정 이건명(李健命)은 “최모는 영걸지재(英傑之材)라 백리에 머물 인재가 아니다.”라고 칭송하였다.

묘소와 재실 고원재(高原齋)가 삼승면 둔덕리에 있다.

키워드 화순최씨, 만오재, 삼승면 선곡리, 고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