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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윤휴(尹鑴)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617(광해군 9)~1680(숙종 6)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정(鍞),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이다. 할아버지는 윤희손(尹喜孫), 아버지는 대사헌 윤효전(尹孝全),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1617년 아버지 윤효전이 대사헌으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밀려났을 때 경주부의 아사(衙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돌에 못 미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에 있는 옛집으로 옮기고, 정묘․병자호란에 보은의 종곡의 외가로 피란하여 어린 시절을 주로 보은에서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학업은 보은 외가에서 외할아버지의 훈도로 이루어졌으나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였다. 병자호란 때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당대의 석학 우암 송시열을 만나 인조(仁祖)가 출성(出城)하여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항복한 사실을 말하고 통곡하였으며, 3일간 학문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이때 송시열은 그의 재주와 학문이 뛰어남을 칭찬하였다.

이후 윤휴의 명성은 선비들 사이에 퍼져서 학문과 세상일에 대한 식견을 겸비한 인물로서 주목거리가 되었다. 1656년(효종 7) 효종은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의 벼슬을 주어 불러들였으나 그는 사퇴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효종은 다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다. 이와 같은 윤휴의 행동에 대하여 허목(許穆)은 “그 인물의 초탈한 기취(氣趣)는 사랑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며, 송시열은 “임금이 부르시는 명령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내니 그 고고(孤高)함이란 이 세상 사람을 내려다보기를 땅벌레와 같이 한다.”라고 말했다.

1675년(숙종 원년) 그는 드디어 벼슬에 나아간다. 유일(遺逸)로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이 된 것이다. 이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5개월 만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겸 성균관 좨주(祭酒)에 올랐다.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1677년(숙종 3)에 다시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2월에 공조판서(工曹判書)이 되고 1679년(숙종 5) 7월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이듬해 정월에 사퇴하고 동작강사(銅雀江舍)에 우거하였으나 3월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갑산(甲山)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그는 본래 당색에는 구애됨이 없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 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南人)으로 활약하였다. 기해예송 때는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1674년 갑인예송(甲寅禮訟) 때에는 같은 기준으로 서인 측 견해에 잘못을 지적하였다. 남인으로서 그는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의 지도자가 되었다.

재직 중에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고 무과(武科)인 만과(萬科)를 설행한 한편 병거(兵車, 전차)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 보급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그의 평생의 신념인 북벌(北伐)을 실현시키려는 뜻에서였다. 군권(軍權)의 통합을 기한 도체찰사부를 설치할 때는 서인과 종척(宗戚)인 김석주(金錫冑) 등의 반발을 사서 경신환국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포의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았다. 1638년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設)>을 지어 이기(理氣)․심성(心性)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 뒤 '중용', '‘대학', '효경', '상서', '주례', '예기', '춘추' 등 여러 경서들에 대한 자신의 분장(分章)․분구(分句) 해석을 가한 '독서기(牘書記)'를 저술하였다. 이 저술은 조선 유학사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업적이다.

그는 주자(朱子)가 성학(聖學) 발전에 최대의 공로를 세웠다고 높이 평가하는 한편 후학들이 성학 발전에 기여하는 길은 주자가 일생 동안 학인(學人)의 자세로 일관하여 새로운 업적을 이루었듯이 선유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의 이러한 학문자세는 처음에는 당색을 초월하여 찬양받았으나, 나중에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을 받기도 했다.

1689년(숙종 15) 3월에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신원(伸寃)에 의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숙종은 승지를 보내어 사제(賜祭)의 은전까지 내렸다. 그의 저술은 윤하제, 윤경제(尹景濟) 두 아들이 정리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세력인 서인과 노론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1927년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석판본으로 '백호문집(白湖文集)'을 간행하였고 1974년 '백호전서(白湖全書)'가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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