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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봉우(具鳳羽)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612(광해군 4)∼1682(숙종 8)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요(景耀)이다. 병암 구수복(具壽福)의 현손(玄孫)이며, 증조는 구변(具忭), 할아버지는 구광원(具光源),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구섭(具欇),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김대승(金大升)의 딸이다. 그는 원래 구수복의 아우 구수담의 현손으로 생부는 구방(具枋), 생모는 평택임씨(平澤林氏)로 임충간(林忠幹)의 딸이다. 구섭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 상산김씨가 낙주 구봉서에 부탁하여 구수복의 동생 구수담의 현손인 구봉우를 후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증조부 구변은 구수복의 둘째 아들로 큰아버지 구수연의 양자로 들어가 후사를 이었다. 뒤에 구봉우의 둘째 아들 구이성(具爾性)이 낙주 구봉서의 후사를 잇기도 한다. 부인은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도승지에 증직된 김성발(金聲發)의 딸이다.

낙주 구봉서의 문인으로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하여 1644년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학문연마에 정진하였다. 이후 백호(白湖) 윤휴(尹鑴)와 평소 친분이 있었는데 윤휴가 인사권을 갖고 있을 때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동문인 농재(聾齋) 김상(金鋿) 형제,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 등을 비롯하여 백원(百源) 신석번(申碩蕃), 손암(損庵) 조근(趙根)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토론하며 일생을 보냈다. 또한 충암 김정, 원정 최수성, 병암 구수복 3인이 노닐던 옛터인 고봉(孤峯) 아래 증조 구변이 지은 정자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리자 정사(亭舍) 3칸을 건립하고 우암 송시열이 쓴 “고봉정사(孤峯精舍)”라는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1682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마로면 관기리에 있다.

키워드 능성구씨, 경요, 구봉서, 윤휴, 마로면 관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