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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김상(金鋿)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607(선조 40)~1674(현종 15)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탁(子琢). 호는 농재(聾齋)이다. 할아버지는 노성현감 김가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덕민(金德民),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오희문(吳希文)의 딸이다. 부인은 만호 이준영(李俊英)의 딸이다. 김덕민의 5형제 중 셋째로 보은읍 종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낙주 구봉서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63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9년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고 1645년 청주목사(淸州牧使), 1648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비롯하여 원주(原州), 해주(海州) 등지의 목사를 지냈다. 1668년(현종 9) 성천부사(成川府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 1671년(현종 11)에 사직서를 올렸으나 오히려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되어 부임하지 않고, 다시 사직소를 올리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으나 청렴하여 집에는 남은 재화가 없었으며 녹봉을 받으면 여러 일가에게 고루 나눠 주고, 공무가 아니면 관가의 말이나 마차를 부리는 사람들이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돕고자 요역(徭役)을 감하여 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애민정신을 실천하였다. 또한 문학과 덕행이 높아 선비들이 추중하고 따랐는데 만주(晩州) 홍석기(洪錫箕), 이명홍(李命弘), 구봉우(具鳳羽) 등 7, 8인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농재집(聾齋集)』이 있으며 묘소는 보은읍 종곡리에 있다.

키워드 경주김씨, 보은읍 종곡리, 구봉서, 청렴, 농재집, 보은읍 종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