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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임의백(任義伯)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605(선조 38)∼1667(현종 8)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계방(季方), 호는 금시당(今是堂)․만한(晩閒)이다. 증조는 한성부판윤을 지낸 임열(任說), 할아버지는 종부시정(宗簿寺正) 임영로(任榮老), 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임연(任兗), 어머니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 영의정 정유성(鄭維城)의 딸이다. 부인은 상산김씨(商山金氏)로 관찰사 김상(金尙)의 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정엽(鄭曄)에게 배우고,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1630년(인조 8)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에 급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두 강화로 피난하였으나 그는 조선이 패할 것을 짐작하고 가족을 서산(瑞山)으로 피난시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난리가 끝난 뒤에 제용감(濟用監) 참봉에 제수되고, 1638년 가례랑(嘉禮郞) 주사(主事)로 장렬왕후 책봉식에 참여하고 그 공으로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1640년(인조 18) 선정비를 건립했다. 1643년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나아가 6년간 선정을 베풀고 돌아와 1649년(인조 27)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효종 초기에 정언․장령․헌납․집의 등의 언관을 거치면서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당여인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 등을 귀양 보낼 것을 주청하였다.

1651년(효종 2) 안주판관(安州判官)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1652년 사간․집의에 임명되었다. 이해 11월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으며 이때 해안 방어에 충실하여 일본의 정황과 해선(海船)의 숫자 등 실태를 파악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동래부를 금정산(金井山)으로 옮겨 견고하게 축조할 필요가 있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1655(효종 6)에 승정원 승지(承旨), 황해감사(黃海監司)를 거쳐 1657년(효종 8)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수원부사,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663년(현종 4) 한성부 좌윤(左尹), 우윤(右尹)을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사은 겸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이해 윤 6월 당시 경상감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때 인조반정으로 관작을 추탈 당했던 아버지 임연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그 관작을 회복시켰다. 1665년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고 현종의 온양 행차 때의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667년 공조참판에 제수되고 도총부 부총관을 겸하였는데 이해 윤 4월 병을 얻어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관례에 따라 제사와 부의를 하사하였고, 처음 덕산(德山, 충남 예산) 가야동(伽倻洞)에 장례를 치렀다가 보은 속리산면 만수리 만수동에 이장하였다.

키워드 풍천임씨, 정엽, 김장생, 만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