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정호(鄭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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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문신 |
| 시대/생몰년 | 1648 인조26~ 1736 영조 12 |
| 형태 | |
| 언어 | 한국어 |
| 지역 | 괴산 |
| 자료출처 | 괴산군지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철(澈)의 현손이며, 종명(宗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溭)이고,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일찍이 학문이 성숙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도 매우 촉망받았으나,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사화를 만나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1682년(숙종 8) 태학에 들어가고 생원이 되었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吳道一)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李師尙)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702년 승지·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다. 1717년 세자(世子 : 뒤위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평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늘 가난하게 지냈다 한다. 수암 권상하와 직제 이기홍과 가까이 지냈고 일찍이 우암이 편모하던 <문의통고>를 수암과 같이 완성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누암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가금면의 누암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를 추가 배향하였다.
1702년에 ‘누암(樓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724년(경조 4)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25년(영조 1) 회복되기도 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건물만 보전되어왔다. 그 뒤 사우(祠宇)가 퇴락하고 송시열·권상하·민정중의 영정을 분실하게 되자, 1935년 정호의 후손들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정호의 위패만을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저서로 ≪장암집≫ 26권이 전해지고, 편서로 ≪문의통고 文義通攷≫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키워드 | 연일정씨, 조선 중기 문신, 기사환국 유배, 누암서원, <장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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