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김득신(金得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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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시인 |
| 시대/생몰년 | 1604 선조 37~1684 숙종 10 |
| 형태 | |
| 언어 | 한국어 |
| 지역 | 괴산 |
| 자료출처 | 괴산군지 |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백곡노인(栢谷老人)․백곡병부(柏谷病夫)․백곡계옹(柏谷溪翁)․백곡노수(柏谷老叟)․백곡노옹(柏谷老翁)․백옹(柏翁)․괴강노옹(槐江老翁)․귀석산인(龜石山人)이다.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이고,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어머니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다. 아내는 경주김씨로 승문원판교를 지낸 김성발(金聲發)의 딸이다.
김득신의 집안이 괴산과 목천에 정착한 것은 그의 고조부 이후였다. 그의 고조부 김석(金錫)은 중종 때 기묘사화에 조광조가 화를 당하자,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관계로 외가인 의성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괴산 법전리로 낙향하여 은거하게 된다. 그 뒤 사헌부 지평을 지낸 증조부 김충갑(金忠甲)이 을사사화 당시 서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직당하고 청주목으로 유배되어, 목천 백전리 이성춘(李成春)의 딸과 혼인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니, 이후 괴산과 목천이 세거의 근거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김시민(金時敏)이 후사가 없어 형님인 김시회(金時晦)의 넷째 아들로 양자를 삼으니 이가 바로 김득신의 부친인 김치(金緻)이다.
김득신은 여느 문인과는 달리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어서 10세 때에야 아버지에게 『사략(史略)』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더욱 분발할 것을 독려하였고, 이에 그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서서히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1625년 22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1627년에 삼년상을 마치고 청운의 꿈을 품고 27세 이후로는 산사와 경향 등지를 두루 다니며 과거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1636년(인조 14) 그의 나이 33세 때에는 병자호란까지 겪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사신이 올 때 백의의 제술관으로 추천을 받기도 하고, 당대 한문대가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고 인정을 받아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이후 여느 문벌의 자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청운의 뜻을 두어 여러 번 과시에 응했으나 번번히 낙방하였다. 그러나 “60세까지는 과거에 응해 보라.”는 부친의 평소 유명에 따라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642년(인조 20) 39세에 그는 식년시 진사 3등 51위로 입격한다. 1646년(인조 24)에 음보(蔭補)로 숙년전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지만, 평소 음관에 뜻을 두지 않았기에 나아가지 않으려 했으나 외삼촌의 강권에 의해 마지 못해 출사하였다가 바로 사퇴하게 된다.
그 뒤에도 여러 번 과거를 치렀지만 거듭 좌절을 겪다가 1662년(현종 3년) 59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병과 19위로 급제하여 비로소 환로에 오르게 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9품관인 성균관 학유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전적․각조좌랑․홍천현감․강원도사․성균관직강․정선군수․풍기군수․성균관사예․사헌부장령․제용감정․사복시정․군자감정․종부시정․사도시정․승문원판교․장악원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아서 홍천현감과 정선군수에 제수되어서는 대신과 재신들이 “김득신은 시인일 뿐, 일에는 소홀해서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저지하여 부임하지 못했고, 사헌부 장령도 두 번이나 제수 받았지만, 역시 ‘본직에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며 탄핵받았다. 당시 피비린내나는 서인과 남인 사이의 붕당싸움의 현장에서 순박한 시심(詩心)을 가진 시인 관료가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득신은 취묵당(醉默堂)으로 내려와 음주부시(飮酒賦詩)로 자오(自誤)하면서 지냈다. 취묵당은 김득신이 문과에 급제하던 해인 1662년(현종 3)에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옆 괴강 가에 건축하고 독서당으로 이용하였던 곳이다.
그후 78세 때에는 세훈(世勳)으로 통정대부가 되고, 80세에는 가희대부(嘉善大夫)로 위계가 올랐으며, 안풍궁(安豊君)에 봉해졌다. 1684년(숙종 10) 81세의 일기로 취묵당에서 생을 마쳤다.
김득신은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고문(古文)을 많이 읽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가 고문 읽기를 시작한 31세 때부터로, 이후 67세까지 36년 동안 36편의 고문을 읽고서 지은 <고문삼십육수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에는 그가 읽은 고문의 목록과 독서 횟수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무려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쉽지 않은 과정을 통해 문장의 작법을 터득하여 각체를 구비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취사를 향한 그의 집념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런 고문 읽기는 그이 문학관 형성에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특별한 스승은 없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사찰에서 공부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을 지낸 벽암대사를 비롯하여 여러 스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혜정(惠正) 스님에게 써준 시에서, “유교와 불교는 비록 도는 다르나 이럭저럭 삼십년을 지냈지. 행여나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우리 함께 참선이나 하세”라고 하였다. 유학자로서의 편협함과 고루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장자>·<노자>도 즐겨 읽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교 사상도 체화하여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각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연을 노래한 사실주의적이고 회화적인 시를 많이 썼고 더 애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몸을 상하게 할 정도였으며, 한 자 한자 시어를 놓을 때마다 고뇌하고 공을 들여 썼으니, 그런 자연관과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당대 최고의 시인묵객이 될 수 있었다.
김득신 남긴 저술은 병자호란 때 많이 타 없어졌으나, 문집인 『백곡집(柏谷集)』에는 많은 글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시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문보다는 시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언·칠언절구를 잘 지었다. <용호(龍湖)>․<구정(龜亭)>․<전가(田家)> 등은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안목도 높아, 『종남총지(終南叢志)』 같은 시화도 남겼다.
이에는 어무적(魚無迹)·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정철(鄭澈)·권필(權韠) 같은 앞 세대 유명시인 등과 남용익(南龍翼)·김석주(金錫胄)·홍만종(洪萬宗) 같은 당대 문사들의 시를 뽑아, 거기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평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歡伯將軍傳)>과 <청풍선생전(淸風先生傳)>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묘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栗里)에 있다.
| 키워드 | 안동김씨, 조선 중기 시인, 취묵당, <고문삽십육수독수기><종남총지>, <환백장군전><청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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