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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봉서(具鳳瑞)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597(선조 30)∼1644(인조 22)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휘(景輝), 호는 낙주(洛州),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병암 구수복(具壽福)의 현손이며, 증조는 구변(具忭),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구광원(具光原), 아버지는 군수 구계(具棨),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기(李耆)의 딸이다. 부인은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딸이다. 장단의 낙하(洛河)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석주(石洲) 권필(權鞸)에게 시(詩)를 배웠는데 이때 보은 선영으로 내려와 대곡 성운이 살았던 속리산 아래 종산(鍾山) 대곡사(大谷寺)에서 독서 강론하였다. 그가 보은에 머무는 동안 보은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성곡(省谷) 김연(金渷)은 “우리 고을(보은)은 땅이 외지고 백성들이 순박하였는데 구경휘(具景輝, 구봉서)가 머물면서부터 문채(文采)가 볼만해졌다.”라고까지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당시 시명(詩名)이 높아 사람들이 그의 시를 많이 읊조렸다고 하다. 인조반정 후에는 임금이 대사성 정엽(鄭曄)에게 인재가 될 만한 선비를 묻자 그를 추천하기도 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으로 임금이 공주로 피난하여 과거를 보았는데, 이때 ‘선비의 몸으로 피난을 온 처지에 이런 기회로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이것은 의리가 아니다’라며 응시하지 않았다. 이(利)를 위한 것이요 의(義)가 아니다”하였다. 환궁한 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검열이 되었으며, 홍문관 수찬․사간원 정언이 되어 반정공신에 아무 공 없이 오른 사람들을 깎아내릴 것을 강력히 주청하였다.

1631년 수찬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어서는 박지계(朴知誡)가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추봉(追奉)하자는 주장을 반대하다 체직되었다. 그 후 다시 이조에 들어가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으며, 그 사이 체찰사(體察使)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후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응교․승지를 거쳐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서천군수․나주목사 등 외직으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고 1638년(인조 16)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중앙으로 들어와 승지․병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당시 큰 기근이 들었던 영남 지방을 안정시켰다. 다시 관직이 교체되어 중앙에 돌아와 호조참의가 되어 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를 겸임하였다.

1642년(인조 20)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과 명나라가 밀통한 사실을 청나라에 고변하였으나 청나라 임금이 “이계의 말이 비록 솔직하나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있다.”하여 본국으로 하여금 처단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곧 이계를 잡아 조정에 보고하자 임금이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가족까지 죽이라.”라고 명하였다. 당시 이계가 청나라에 뇌물을 바쳐 벗어나기를 도모하여 형을 집행하는 관원이 일부러 지연하고 있었는데 그가 서둘러 이계를 끌어다가 베었다. 수일이 지난 뒤에 청나라에서 이계를 사면시키라는 기별이 왔으니 앞으로 있을 화근을 신속히 처리한 것이다. 또 청나라에 붙어 권력을 휘두른 정명수(鄭命壽)를 믿고 횡포를 부리던 사촌아우를 목 베어 기개를 세상에 떨쳤다.

이후 관서 지방에 있던 오랜 병폐들을 없애고, 백성들을 위해 노력하다가 재직 중 병을 얻어 1644년 49세의 나이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재치가 있었고 권력에는 추호도 아부하려 함이 없었으며,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마찰을 줄여 인조로부터 제일의 신하로 신임을 얻었기도 하였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사륙문(四六文, 변려문)에 능하였다.

키워드 능성구씨, 권필, 대곡사, 사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