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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벽암(碧巖) 각성(覺性)
분류 승려
시대/생몰년 1575(선조 8)∼1660(현종 1)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선승(禪僧)․승병장(僧兵將)으로 속성(俗姓)은 김해김씨(金海金氏),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법명은 각성(覺性)이다. 어머니는 조씨(曺氏)이며 보은읍 서삼산(西三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조씨가 자식이 없어 북두칠성에 기도하였는데 꿈속에서 오래된 거울을 보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1583년(선조 16)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華山)에 들어가 설묵(雪默)에게서 출가하였으며, 1588년(선조 22)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후 불경을 공부했다. 선수(善修)가 화산에 왔을 때 그를 한 번 보고는 뛰어나다 여겨 데려다가 제자로 삼았다. 그 뒤 스승을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의 명산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스승 선수를 따라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가야산에 있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成)은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뒤 스승과 함께 지리산으로 옮겨 ‘삼걸(三傑)’로 널리 알려졌던 충휘(忠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시게(詩揭)를 남겨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나타냈다.

1600년(선조 33)에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하안거를 하였는데 스승의 뜻에 따라 강석(講席)을 열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제자들에게 항상 “생각이 망령되지 않아야 하고 얼굴에 부끄러움이 나타내지 않도록 하여야 되며 허리를 구부려 앉지 않아야 한다(恩不忘面不傀腰不屈).”라는 3가지 계(戒)로써 일깨웠다. 1606년 가을 모친상을 당하여 속리산 가섭굴(加葉屈)에서 재(齋)를 행하고 복을 빌었다.

1612년(광해군 4) 선수가 광승(狂僧)에게 무고를 입어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치죄하다가 그의 덕에 감복되어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부휴와 각성을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고 그곳에서 많은 사대부와 교유를 갖게 되었으며 특히 동양위(東陽尉) 신익성(新翊聖)과 가까이 지냈다.

1615년(광해군 7) 스승 선수가 입적하자 대중과 강석을 이어받지만, 고사하고 지리산 칠불암으로 옮겼고 1618년 다시 신흥사(新興寺)로 옮기자 7백 인의 대중이 모여들어 이를 피해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들어갔다. 1619년 오대산 상원암(上院菴)에서 동안거를 하였다. 이때 광해군이 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베풀면서 그를 맞이하여 설법을 하게 하였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으며 이 기간 중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법주사를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報恩闡敎) 원조국일도(圓照國一都) 대선사(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1632년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전국 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내 의승군 3천 명을 모았다.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면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났으므로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후학들을 위해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의 글을 지었다. 1640년 봄에 쌍계사(雙紒寺)를 중수하였고 그해 8월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인조 19) 해인사로 가서 머물 때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사퇴하고,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으며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이때 왕자였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인조 24)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은거하였다.

이후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가서 지냈으며,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퍼하기도 하였다. 이해 가을 미미한 병세가 있었는데 이때 제자들에게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1660년 장차 입적하려 할 때 제자들이 게송을 청하자 “염송(拈頌)이 30편이요 계경(契經)이 8만 게송(偈頌)이로다. 어찌 뒤섞여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웃을 만 하도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라는 게송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때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百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의 문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벽암은 한국불교 전통성을 계승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붕괴된 한국불교의 법맥은 물론 불교적 기반으로서의 사원 중창 그리고 승려 개인에 대한 가르침 등 조선후기 불교계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더욱 그는 정혜쌍수(定慧雙修)․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으며 무자간화선(無子看話禪)을 크게 중요시하였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原集圖中決疑)』, 『간화결의(看話決疑)』,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등이 전하는데, 이들 책은 벽암의 선사상이 고려 보조지눌(普照知訥)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스승의 선수의 시문집인 『부휴당집(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현재 법주사 입구에 있는 <벽암대사비명(碧嵓大師碑銘)>은 충북지방유형문화제 제71호로 지정되었다.

키워드 김해김씨, 서삼산, 광해군, 법주사, 항마군, 부휴당집, 지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