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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김덕민(金德民)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570(선조 3)∼1651(효종 2)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방량(邦良), 호는 간서재(澗西齋)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장유(金將有)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제군수(金堤郡守) 김천부(金天富), 아버지는 노성현감(魯城縣監) 김가기(金可幾),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유윤상(柳潤祥)의 딸이다. 보은읍 종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첫 부인은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신식(申湜)의 딸인데 정유재란 때 피난 중 왜적에 만나 절개를 지키고 죽어 정려가 내려졌다. 두 번째 부인은 해주오씨(海州吳氏)로 오희문(吳希文)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 말을 배우면서 대곡 성운에게 글을 배웠는데 글을 읽고 외는 것이 남보다 갑절이나 많았고 8세 때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필법(筆法)도 마치 어른과 같아 대곡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아꼈다고 한다. 대곡 사후에는 나이 13세에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부임한 중봉 조헌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으며, 뒤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예학(禮學)을 배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3세의 나이로 부모의 허락을 받고 스승 조헌의 의병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그가 독자이며 그의 숙부 김가권(金可權)이 이미 의진에 있다고 하며 참여를 허락하지 않아 돌아왔다. 1603년(선조 36)에 아버지 김가기가 편집을 마치고 정유재란에 순국하여 간행하지 못한 성운의 '대곡집(大谷集)'을 충청도관찰사인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도움으로 발간하였다.

1606년(선조 39) 식년시(式年試)에서 37세의 나이로 생원에 합격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비방하며, 퇴계 이황이 일찍이 대곡 성운을 ‘청은(淸隱)’이라 지목하였는데 청은은 편절(偏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는 대현(大賢)을 모함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글을 올렸다. 그러자 김덕민이 상소를 올려 “청(淸)이란 한 글자는 성현들의 고상한 풍치이고 은(隱) 또한 대곡의 실덕(實德)이니 퇴계가 대곡을 청은으로 지목한 것은 흉잡는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1613년(광해군 5) 44세에 와서별제(瓦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정인홍이 전일의 감정으로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그를 탄핵하도록 하였다. 이후 광해군 말에 정사가 문란해지자 과거를 그만두고 향리에 은거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사축별제(司畜別提)에 임명되고 곧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겼다가 몇 년 후 고향에 돌아왔다.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자 의병을 모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따르고, 화의가 이루어지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로 승진되고, 1628년(인조 6)에 경상도 용궁현감(龍宮縣監)에 제수되어 1633년(인조 11)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51년(효종 2)에 나이로 인하여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고, 그해 12월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산외면 대원리에 있다.

키워드 경주김씨, 보은읍 종곡리, 성운, 정경세, 의병, 대곡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