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정광제(鄭匡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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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효자 |
시대/생몰년 | 1688년(숙종 14)∼1753년(영조 29)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옥천 |
자료출처 | 옥천군지 |
조선 후기 문신·효자로 자는 정숙(正叔),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직(鄭溭)이며, 할아버지는 정지하(鄭之河)이다. 아버지는 정상길(鄭相吉)이며, 어머니는 홍응원(洪應元)의 딸 남양홍씨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옥천읍 교동리에서 성장하였다. 비록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바르게 성장하여 학문 수학에 힘쓰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717년(숙종 43) 온양정시(溫陽庭試)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고, 1725년(영조 1) 병조정랑이 되었다. 같은 해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삼남(三南)지방 수령(守令)들이 재앙을 입은 논·밭에 대하여 공평하게 힘써주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니 이를 엄하게 다스리고,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727년(영조 3)에는 세자의 강학(講學)에 참여하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색이 강한 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1732년(영조 8) 4월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국상(國祥)에 불참하여 파직되고, 불서용(不敍用)의 처벌을 받았다. 1733년(영조 9) 사헌부 장령으로 재기용되었으며, 1738년(영조 14)에 세자시강원 필선·사간원 헌납(獻納), 1739년(영조 15)에 사헌부 장령, 1747년(영조 23) 우부승지·승지에 임용되었다. 이어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관직생활 동안 항상 부정과 불의를 멀리하고 청렴한 관료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늘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효도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회갑이 되는 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 이 기간 동안 상복을 갖추고 죽과 소찬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극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1753년(영조 29)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754년에 정려되어 1755년 그의 고향인 옥천읍 교동리 옥천향교 옆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효자문에는 “효자가선대부행용양위부사직겸동지의금부사위도총부부총관정광제지려(孝子嘉善大夫行龍驤衛副司直兼同知義禁府事偉都摠府副摠菅鄭匡濟之閭)”라는 편액이 있다.
키워드 | 연일정씨, 조선 후기 문신, 효자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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