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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이도영(李道榮)
분류 실업가
시대/생몰년 1914~1973
형태
언어
지역 청주
자료출처 청주시지

실업인이며 언론인으로서 종합학원 홍익학원(弘益學園)의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사업가. 호는 문헌(文軒)으로 청원군 가덕면에서 이예승(李禮承)의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여 문의보통학교 입학 전에 이미 소(小)․대학(大學)과 논어 등을 익힌 그는 제2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30대의 청년으로 일신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실업계에 첫 발을 내디딘 데 이어, 1950년에 남한제사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실업인으로서의 기반을 굳혔으며, 정치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해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청원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참여, 헌법위원으로 위촉되어 활약한 바 있다.

`51년에는 한국원양어업(주)을 인수한데 이어 `53년에는 충청일보사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언론을 통한 사회공익사업에 앞장섰고, 1956년에는 사학의 명문 홍익학원을 인수, 이사장을 맡음으로써, 평소 염원해 오던 육영사업가로서의 뜻을 펴게 되었다. 언론과 육영사업 등 사회 공익분야에 대한 그의 남다른 집념은 `71년 청주문화방송까지 인수함으로써, 충청일보와 함께 충북사회의 명실상부한 향도체(響導體)로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실업인으로 뿐만 아니라, 언론․교육사업가로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온 그는 경제단체의 중책을 맡아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 한국수출공단 이사, 한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여 선두에서 경제계를 이끌었으며, 1969년에는 한일경제협력위원회 창립총회의 한국대표로 참여, 민간외교의 일익을 담당한 바도 있다. 1950년에 충북태생의 불우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충청 장학회」의 혜택을 입은 학생이 600명을 훨씬 넘는다는 사실도 선생이 남긴 큰 업적이라 하겠다.

수출진흥 공로로 수여받은 대통령 표창을 비롯하여,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협력에 따른 표창, 대한 체육회장 표창, 문교부장관 표창 등 많은 포상을 받았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푸른동산에 있다.

키워드 이도영, 실업가, 언론인, 육영사업가, 충청장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