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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민철기(閔喆基)
분류 실업가
시대/생몰년 1908~1991
형태
언어
지역 청주
자료출처 청주시지

실업인이며 육영사업가. 호는 한암.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경기도 안산군 서운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시는 양반 가문의 천석지기 부호의 장손으로 태어났으나, 조부가 남겨놓은 유산을 선대의 3형제가 탕진함에 따라, 어려서부터 모진 고생을 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4세 때에 어머니를 잃고 외가와 숙모댁을 전전하며 눈치밥을 먹고 자라온 그는 17세 되던 해 민씨 문중이 많이 사는 청주로 와서 친척이 되는 민참령(閔參領) 댁의 머슴생활을 시작, 고달픈 개척인생의 도정에 올랐다. 왜소한 체구에 배운 바도 없는 그는 오로지 근검과 성실 하나만을 무기로 삼아 열심히 머슴살이를 하여 6년만인 25세때에 결혼을 했고, 그 이듬해인 26세 되던 해엔 초가삼간을 지어 독립하였다.

그후에 그의 노력은 거듭 배가되어 떡장사, 엿장사 등 안 해본 일어 없었고, 그렇게 해서 해방 전에 이미 상당한 재력을 쌓은 그는 1958년 「신흥제분주식회사」를 설립, 향토기업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 뒤 1067년에는 속리산 관광주식회사를 설립, 속리산 관광호텔과 고속버스를 운영하였고, 뒤미처 69년에는 합자회사 「중도석유」와 「신흥목장」을 설립, 경영하는 등 한때는 종합소득이 전국 2위의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무학을 자탄, 육영사업에 대한 포부를 필생의 사업으로 간직해왔던 그는 학교법인 신흥학원을 설립, 이 지역 후학들의 배움터를 이룩하였다. 그가 설립한 신흥고등학교는 현재 36학급 2천여명 재적의 명문 고교로 성장되어있다. 체험적 「가난의 철학」을 남긴 것으로 더욱 유명해진 그는 그야말로 거짓을 모르는 성실 하나로 자신의 뜻을 살리고 간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기업경영에 대한 공로로 석탑 산업포장(1972)과 철탑 산업훈장(1974)을 수여 받은 데 이어 1978년에는 정부로부터 교육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1921년 2월 향년 84세로 별세, 묘소는 청원군 부용면 선영에 있다.

키워드 민철기, 실업인, 육영사업가, 신흥제분주식회사, 중도석유, 신흥목장, 신흥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