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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김태희(金泰熙)
분류 독립운동가
시대/생몰년 1881~1937
형태
언어
지역 청주
자료출처 청주시지

교육사업과 청년운동을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김태희는 청주시 탑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나, 일찍 신사상에 눈을 떠 기독교에 들어가 예수교 장로회의 장로로 활동하면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11월에 방흥근(方興根)․김원배(金元培)와 함께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개설하여 교육구국활동에 뛰어들었다. 1908년에는 학교의 경영이 어렵게 되자 미국인 선교사 민노아(閔老雅)를 받아들여 종교계통의 학교로 개편하였다. 또 청신여학교(淸信女學校)도 설립하였으며, 1923년에는 학제 변경으로 청남학교에 남녀공학제를 실시하여 명실공히 학교로서의 기반을 확립했다.

1909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9월부터는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참사(參事)를 맡아 군자금모집과 독립운동문서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의 공작책임을 담당하였다. 또 청주청년회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장덕수(張德秀)가 주도한 조선청년회 연합회의 총회간부로 뽑혀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미국인 목사 민노아의 배신을 계기로 교회와 절연하고, 충남 대덕군 신탄진으로 이주하여 야학활동을 통해 청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7년 5월 26일 조국광복의 한을 품은 채 신탄진에서 서거하였다. 유해는 신탄진 공동묘지에 묻혔었는데, 광복 후 1959년 조건상(趙健相)의 주선으로 미원면 기암리(岐岩里)로 이장되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키워드 김태희, 독립운동가, 대동청년당, 건국훈장애족장(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