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최명수(崔明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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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독립운동가 |
시대/생몰년 | 1885~1951 |
형태 | |
언어 | |
지역 | 청주 |
자료출처 | 청주시지 |
기독교인으로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주력한 최명수는 청원군 북이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나 국운이 점차 어지러워짐을 보면서 기독교에 투신하여 전도사로 선교활동을 하는 한편 청년강습소를 열어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4년 남만주를 중심으로 김동삼(金東三) 등 70여 명과 함께 공리회(共理會)를 조직하여 사판(査判)의 직책을 맡아 교포들의 생활안정과 독립군 기지건설에 힘썼다. 1914년 7월 재만(在滿) 동포들의 대동일치한 새로운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이 조직되고 공리회도 이에 합류하자 통동단총(通東團總)이 되어 자치행정을 담당하였으며, 이어 부민단이 부민회로 개편되자 검무감(檢務監)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부민회 산하의 교민이 수십만에 이르게되자 독립운동을 위한 총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산재한 기관들을 통합하여 1919년에는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고, 교포들의 자치기관으로는 한족회(韓族會)를 구성하였다. 군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서로군정서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중앙회 회장으로 피선되어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한족회에서는 검찰부장으로 교포사회의 질서유지 및 친일분자의 처단에 힘썼다.
1920년 이후, 반일혁명유족 구출의 총책임을 맡아 상해에서 활동하던 중에 1923년 체포되어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1월 만주로 돌아가 정의부(正義府)의 검무감(檢務監)이 되었으며, 1928년 8월의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3부의 통합운동이 실패하자 이어 국민부(國民府)의 조직에 참가하여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7년 다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1945년 10월 환국하여 광복군 국내지대(國內支隊) 조직에 참여하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 3월에는 건국협성회(建國協成會) 회장, 10월에는 대동청년단 정치고문 등으로 활동하면서 건국사업에 진력하였다. 1947년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1949년 10월 대한민국 감찰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새로운 정치기강을 바로잡는 데 공이 컸다. 1951년 향년 67세로 서거하였으며, 군민장으로 향리에 안장되었다.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키워드 | 최명수, 독립운동가, 선교사, 부민단, 군정부, 한족회, 정의부, 건국협성회, 건국훈장애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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