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조유안(趙惟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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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효자 |
시대/생몰년 | 1605~1672 |
형태 | |
언어 | |
지역 | 음성 |
자료출처 | 음성군지(2008) |
자는 탁이(卓爾), 호는 삼외옹(三畏翁)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금왕읍 유촌리 가평(가래들)에 집이 있었다.
성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고, 기질이 온화하며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자 향 피워 빌며 대신 죽기를 소리 없이 원했고, 변을 맛보며 간호하고 지혈하여 소생시키며, 아버지께 말을 많이 하면서 미음을 끓여 드려 3년을 더 사시게 하였다.
부친상이 끝나기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혈하며 정성을 다하다가 상을 당하자 거적자리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묘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을 당하여 90세의 할머니를 업고 피난하다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니 지세가 높고 가파르며 험하여 막히고 끊어져 있어 거북이처럼 손으로 할머니를 잡고 발로 버티며 기어서 피난하는데 할머니는 자식 잃고 화병이 되어서 이내 조모상을 당하여 무려 8년을 시묘하는데 시종 같았다.
상을 마치고 후천(朽淺)가에 작은 집을 짓고 삼외(三畏)라 편액하니, 군자가 두려워할 세 가지로 천명(天命), 대인의 말, 성인의 말이라 하여 자호로 삼고, 이곳에서 성현의 글과, 가언(嘉言)과, 선행을 읽으며 여생을 보냈다.
죽은 후 향리 사람들이 방문하여 살아있을 때의 행실을 닦은 효도와 학행은 한 도(道)의 으뜸이라 하고는 본도 백여 선비들이 합사하여 공의로 조정에 장계하였다. 그이 행적을 경종 임금이 듣고는 경종 3년(1723)에 정려를 명하고 포상하여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 한원군(漢原君)에 추봉되었다. 경종 4년(1724) 5월에 금왕읍 유촌리 가래들에 조유안 효자문을 세웠다. 영조 원년(1725)에 이세근(李世謹)이 정려기문을 찬하였으며, 묘는 금왕읍 삼봉리에 있다.
키워드 | 효자, 학자, 삼외, 한원군, 효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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