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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김가기(金可幾)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537(중종 32)∼1597(선조 30)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원(士元), 호는 일구당(一丘堂)이다. 판도판서 김장유의 8세손이며, 고조는 김처용(金處庸), 증조는 판관 이증손(李曾孫), 할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 김벽(金碧), 아버지는 군수 김천부(金天富)이다. 첫 부인은 창녕성씨(昌寧成氏)로 대곡 성운의 형 성우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유윤상(柳潤祥)의 딸이다. 보은읍 종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0여 세에 을사사화 후 종곡에 은둔한 고모부 대곡 성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후에 성운의 형 성우(成遇)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그는 성운의 학문을 온전하게 이어 받았으며, 성운을 찾아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남명 조식(曺植),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과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등 당대 석학들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1579년(선조 12)에 식년시에서 생원 1등 5위로 합격하고, 노성현감(魯城縣監)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고향에 돌아와 스승 성운의 문집인 '대곡집' 간행에 몰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곡집'은 그의 아들 김덕민(金德民)에 의해 1603년 간행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에 물러갔던 외적이 다시 침입하여 그가 살고 있던 마을에 쳐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지르자 환갑 나이에 맨손으로 적들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전주유씨(全州柳氏)가 그를 구하려다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그날 그의 며느리 고령신씨(高靈申氏)도 피난하던 중 왜적을 만나 적을 죽이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1598년(선조 31)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되고, 부인 유씨는 숙부인으로 추증되었으며, 며느리 고령신씨는 정려가 내려졌다. 묘소는 보은읍 성족리 대곡 성운의 묘소 아래에 있다.

키워드 경주김씨, 성운, 정유재란, 보은읍 성족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