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육영수(陸英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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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영부인 |
| 시대/생몰년 | 1925.11.29.~1974.8.15. |
| 형태 | |
| 언어 | 한국어 |
| 지역 | 옥천 |
| 자료출처 | 옥천군지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며 박근혜 현 대통령의 어머니로, 옥천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육종관(陸鍾寬)과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관성(管城, 옥천)이다. 당시 아버지 육종관은 옥천 지역의 소문난 부호로, 육영수는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1938년 옥천 읍내 죽향국민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상경하여 배화여자고등보통학고에 입학하였다. 당시 5:1이라는 경재률을 뚫고 전체 6위로 합격하였다고 한다. 1943년 졸업 후 고향 옥천으로 내려와 3년 동안 집안 일을 관리하다가 1945년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옥천여자중학교)에 부임하여 가사 과목 교사로 1년 3개월간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중일 때 육군 소령 박정희와 선을 보아 약혼식을 올리고 박정희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되었을 때 1950년 12월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 대구에서 하숙하였다. 당시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 역시 남편 육종관의 축첩에 반발하던 중 딸 육영수의 결혼을 계기로 충북 옥천집을 나와 딸과 함께 살았다. 남편 박정희와의 사이에 근혜, 근령,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5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 하여 덕망을 쌓았다.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도 그녀는 굶는 동포가 있는 한 나라의 번영은 있을 수 없다는 지표를 마음에 새겨두어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부터 밥짓는 쌀에서 한 줌씩 절약하여 모은 쌀 네 말을 청와대 청소부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또한 그녀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끝으로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영수는 사회 각층으로부터 들은 애기를 그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남편 박정희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영부인으로 있는 동안 많은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양지회’라는 봉사활동 모임을 만들어 불우한 근로여성 위문, 환경미화 등 여러가지 사회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여성의 자질향상과 기술교도를 목적으로 ‘양지의 집’을 지어 개관하고 일반 부녀자의 생활보호, 복지향상, 기술교도, 직업여성에 대해서는 교양지도와 계몽을 하였다. 또한 전국 주요도시에 9개의 여성회관을 건립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어린이와 인재 양성에 관심을 두어 1967년에는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창간하여 어려서부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애국심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어깨동무』는 일반 아동잡지와 마찬가지로 시중 서점에서 판매도 하였으나 책을 구하기 어려운 낙도와 벽지 어린이들에게 달마다 무료로 보내주었다. 1968년 5월에는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正英舍)를 건립하였다.
1970년 7월에는 남산에 어린이 회관을 건립하여 어린이들에게 놀면서 배우는 유익한 시설을 만드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였다. 1973년 8월에는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자립능력을 키워주기도 하였다. 이외에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영부인로서 소선수범하여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다.
연말마다 고아원․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1969년부터 전국에 87개소나 되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립할 수 있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영부인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세계 여러나라를 공식 방문하면서 세계 속에 한국 여성미를 알리기도 하였다. 1964년 12월 독일연방공화국, 1965년 5월 미국, 1966년 2월 말레이시아, 태국 및 중화민국, 1968년 9월 호주․뉴질랜드, 1969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문 등 영부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녀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는 항상 한복을 입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으로 인하여 1964년 중화민국의 특기대수일등경성 훈장, 독일연방공화국의 특등대십서공로 훈장, 1966년 말레이시아의 마고타네가라 최고훈장, 태국의 1등 촐라촘크라오 최고훈장, 중화민국의 특기대수서운 훈장, 1968년 에티오피아의 시바 여왕 대훈장, 1969년 월남국의 특등 킴판 훈장, 니제의 끄랑끄로와·드리토·니쇼날·드·니제 훈장 등 수많은 수상을 하였다.
이렇듯 한 나라의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 항상 소박하고 성실한 내조자로서 한국의 주부상을 내외에 과시하던 그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에게 저격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당시 서울국립국장에서 거행된 제29주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 도중 저격범의 총탄에 희생당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의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다. 장례식은 국민장을 치러져 8월 19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각국 조문 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우리 시대가 낳은 훌륭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이상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국민의 가슴 속에 심어 놓었다. 옥천에서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 1998년 옥천읍 여성회관 앞에 동상을 건립하여 매년 광복절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또한 옥천읍 교동리에 있는 그녀의 생가지는 충청북도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2000년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2010년 5월 완공하고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 키워드 | 영부인, 양지회, 여성회관 건립, 어깨동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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