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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류승규(柳承畦)
분류 소설가
시대/생몰년 1921.1.4.~1993.9.16.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옥천
자료출처 옥천군지

옥천 출신의 현대 소설가로 대표적 농민작가이다. 호는 초무(樵霧), 본명은 재만(在萬),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군북면 추소리 207-4번지에서 아버지 류흥열(柳興烈)과 어머니 정모정(鄭募貞) 사이에서 1남 1녀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고향 추소리는 문화류씨 집성촌이었으며, 가세는 중농 정도였다. 이곳은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어려서 마을 집안 어른들께 천자문 등을 배웠으며, 옥천 공립보통학교 졸업하였다.

16세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같은 날 돌아가시며 그의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뒤로 큰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며 졸지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이후 그는 일가붙이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가 1940년 20세에 고향을 떠나 26세 되던 해인 1945년까지 회령, 종성, 함흥 등 북한과 만주 지역을 방랑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수업에 전념했다. 이 당시 일본어로 된 책을 통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문학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키웠다고 한다.

해방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당시 농민작가 이무영(李無影)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어느 날 조치원역에서 이무영의 단편소설 「흙의 노예」를 구입하게 되었고 열차 안에서 그것을 독파하고, 바로 경기도 군포에서 소설을 쓰고 있던 이무영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밤마다 소설을 쓰기에 매달렸다. 1년에 몇 차례 원고를 써서 이무영에게 보내면 평을 해서 편지를 하고 또 직접 올라가서 작품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은 이무영의 주선으로 서울로 올라와 서항석(극작가)이 만든 <예술계> 신문사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끼니도 잇지 못할 정도의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되었고, 신문사가 문을 닫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이기영(李箕永), 이태준(李泰俊), 김남천(金南天) 등의 소설을 보며 문학수업을 한 결과 1950년에는 이무영과 농민문학 활동을 함께 하던 박영준(朴榮濬)이 주재하던 <민성(民聲)>에 작품이 추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6․25가 발생하여 조판까지 마친 상태에서 책 발간이 무산되고 등단은 좌절되었다. 이후 류승규가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56년이었다. 1956년 「예순이」, 1957년 「빈농(貧農)」이 <자유문학>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문단에 등단한 이후 류승규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일관되게 농민의 이상과 농촌의 현실, 특히 가난한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만을 고집스럽게 써 왔다. 처음 들고 나온 「빈농(貧農)」의 제목이 말해주듯 가난하고 억눌린 하층 농민의 하소연을 거름 냄새 나는 진한 충청도 내륙 사투리로 표출하였다. 또한 이때에 그는 농촌의 절실한 현실을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고향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던 류승규는 문단의 중앙집권적 모순된 현실을 통감하고, 농사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1969년 40여 년간 살아온 고향과 25년간 종사해 온 농업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농민소설만을 고집하던 탓에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 날 수 없었고, 그 결과 상도동, 한남동, 쌍문동, 상계동 등 20여 차례 이사를 하며 도시 빈민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작품은 주로 농촌 제재의 소설을 썼다. 대표적인 단편소설 「농기(農旗)」, 「농지(農地)」, 일제 강점기 농촌 농민의 수탈사인 장편소설 <굴욕일지(屈辱日誌)> 그리고 어촌 얘기인 <외롭지 않은 고도(孤島)> 등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류승규는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었으나 다방 구석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고, 또한 남정현(南廷賢), 최태응, 김성한(金聲翰), 송지영(宋志英), 윤병로 등과 같은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1978년에 한국문인협회 이사가 되고 그들로부터 받은 자극으로 한동안 무섭게 소설을 써 한 해에 무려 10여 편의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 편집위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중병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고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회복하였다. 1985년 70세가 다 되어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환산성 아래 대청댐 상류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소설을 썼다. 낙향 후에 장편 <말미개뜸 새바람>, 중편 「성전보(聖戰譜)」 등을 집필했으며 중편집 <농지>를 출간했다. 1989년에는 잠시 한국문학회 고문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필생의 장편소설 <떠꺼머리>를 탈고한 후 1993년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9월 18일 추소리에서 한국문인협회 문인장으로 거행되었다. 1999년 5월 타계 6주기에 ‘소설가 류승규 문학비’를 옥천군의 후원으로 한국농민문학회에서 세웠고, 2003년 10주기에는 ‘류승규문학제’를 개최하고 ‘류승규문학상’을 제정하여 현재까지 시상하고 있다.

그의 대표 소설집으로는 <꿈이 있는 사랑>(1976), <춤추는 산하>(1976), <흙은 살아있다>(1977), <익어 가는 포도송이>(1983), <농지(農地)>(1988) 등을 꼽을 수 있다.

수상 내역에는 1979년 제3회 흙의 문학상, 1987년 제6회 일붕문학상, 1987년 제5회 흙의 문예상, 1990년 옥천국민대상(문화상), 1993년 제1회 한국농민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소설은 주로 가난한 농민의 한과 농촌사회의 구조적 모순, 일제 강점기 농민의 실상을 표출하여 전환기 농민문학을 활짝 꽃피우며 한국 문학사를 빛내었다. 20여 년간이나 농촌에서 직접 농사를 생업으로 지낸 그에게는 이 경험이 문학 이전에 민족적 수난의 연속이었으며, 가난과 억압의 실감이었다. 그는 농촌을 가장 비서정적인 경제 집단으로 파악하여 작품화하고 있으며 이 점은 앞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무영과 함께 대표적인 농민소설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농촌의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서정적인 농촌소설이 아닌 농민의 현실적 고뇌와, 한국 농촌의 특수한 상황을 주로다룬다는 평이다. 주인공은 주로 토지가 적은 빈농이며 농촌특유의 속담, 비유법적 수법을 많이 쓴다. 별다른 학력없이 경험을 토대로 농민의 입장과 농민의 이익에 입각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문학의 사명으로 여기는 작가다.

키워드 소설가, 농민문학, 빈농, 굴욕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