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정지용(鄭芝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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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시인 |
시대/생몰년 | 1902.5.15.~?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옥천 |
자료출처 | 옥천군지 |
현대시인으로 1902년 5월 15일 옥천읍 하계리(下桂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명(兒名)은 池龍(지용)이고, 후에 芝溶(지용)으로 바꿨다. 아버지는 정태국(鄭泰國)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 미하(美河)이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25일 제4회로 졸업하였다. 1913년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12살 동갑내기 송재숙과 결혼하였다. 이후 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처가 쪽친척이 되는 서울의 송지헌 참사에서 4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8년 공립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한 후 형편이 어려워 어려움을 겪던 중 민영휘를 만나 학교를 마쳤다. 휘문고보 시절 학업성적은 극히 우수한 편으로 그의 재능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정지용은 1학년생으로서 ‘요람동인(搖籃同人)’을 결성하여 박제찬, 박팔양 등과 함께 『요람(搖籃)』을 창간하였다. 또한 1919년 『서광』 창간호에 유일한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에 휘문고보에서 일제를 규탄하고 학교 시설을 개선하라는 항의 사태가 일어났는데, 이때 정지용은 교직원 규탄 연설을 하고 이로 인하여 무기정학을 처분 받지만 곧 복학하게 된다.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경도(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유학시절인 1925년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 『학조』 창간호에 시 「카페 프란스」를 비롯하여 동시와 시조시를 발표했다. 1929년 졸업하고 바로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아 1945까지 16년간 영어교사로 재직하였다.
1930년에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30년 8월에는 이태준, 정지용, 이종명, 이효석, 유치진, 이무영, 김유영, 조용만, 김기림 등이 모여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아홉명의 ‘구인회’를 만들었다.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새로 가입하였다.
활발한 문단활동을 하던 그는 1935년 10월에 시문학사에서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였다. 총 수록 시 편수는 89편으로 그 이전의 잡지에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실렸다. 이후 1938년 카톨릭 재단에서 주관하는 잡지 『경향』의 편집을 돕기도 하였고, 1939년에는 8월에 창간된 『문장』에 이태준과 함께 참여하여 심사위원을 맡아 잡지를 만드는데 동참했다. 이때 『문장』을 통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을 비롯하여 이한직(李漢稷), 박남수(朴南秀) 등을 등단시켰다. 이 시기에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하였다.
1940년에는 평양출신 월북화가인 길진섭 화백과 함께 평안북도에 있는 선천, 의주, 평양, 오룡배 등지를 여행하면서 글과 그림으로 만들어진 기행문 「화문행각」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9월 ‘문장사’에서 그의 두 번째 시집인 『백록담』을 간행하였다. 총 수록 시편은 「장수산1, 2」와 「백록담」 등 33편이다. 이후 절필하다시피하여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이후 휘문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10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여 한국어와 영어, 라틴어를 담당하였다. 1945년 12월 8일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한 명동성당 집회에서 그는 자작시 「그대들 돌아오시니」를 낭독하였다. 그해 12월 13일 창립된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아동분과 위원장 및 중앙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고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 1946년 10월에는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가능한 지역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지지하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하여 친일파를 운운하며 비판적 논설을 썼다. 소설가 김동리는 정지용의 좌경은 『경향신문』 주필시절부터 급속히 심해졌다고 증언하였다. 불과 10개월 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경향신문에 이름만 걸친 게 아니라 맹렬하게 글을 쓰며 활동하였다. 이 해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했다.
1947년 8월 정지용은 경향신문 주간 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돌아왔다. 하지만 1948년 유엔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의되었고, 문학동맹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정지용은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녹번리(현재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초당에서 서예로 소일을 하면서 『문학독본(文學讀本)』 출간했다.
1949년 2월 『산문(散文)』을 출간했으며, 6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金起林)·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된 이후 행적이 묘연하여 이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그의 행적에 대해 추측이 무성하며 사망 장소가 의정부 소요산이라거나 평양이라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그의 죽음과 북한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지용은 월북작가라는 굴레가 씌워져 논의조차 금기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38년만에 우리 문학사로 되돌아 왔다. 해금 이후 가장 먼저 옥천에 시비와 동상이 세워지고 지용문학제가 개최되었다. 또한 이해에 민음사에서 『정지용 전집(鄭芝溶全集)』이 시와 산문으로 나뉘어 2권으로 발간되었다. 1989년에는 ‘정지용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이 1회 수상자로 선정된 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5년에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향수’가 가요로 만들어져 발표되기도 했다.
1996년 그의 생가터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그 옆에 연건평 120평의 정지용문학관이 세워져 정지용 관련 연구서와 유품, 지용의 시집·산문집 등이 전시되고 있다. 문학관 앞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03년 5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가 유학했던 동지사대학에는 2005년 12월 18일 정지용의 시비 ‘압천’이 세워졌다.
정지용에 대한 연구 실적은 2013년 말 석사 이상의 논문이 300편이 넘는다. 교과서 속의 정지용의 시 또한 검증으로 발행된 이후 각 출판사의 책에 정지용의 시는 빠짐없이 수록될 정도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에 이미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시단(詩壇)을 대표했던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크게 세 시기로 특징이 구분된다. 먼저 1926년부터 1933년까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다음으로 그가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던 1933년부터 1935년까지로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여러 편의 종교적인 시들을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1936년 이후 그는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자연시들을 발표하였다.
키워드 | 시인, 요람동인, 구인회, 경향신문 주간, 납월북작가, 향수, 지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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