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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성제원(成悌元)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506(연산 12)∼1559(명종 14)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로 본관은 창령(昌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동주(東州)․소선(笑仙)이다. 아버지는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성몽선(成夢宣),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로 부사를 지낸 조서종(趙瑞鍾)의 딸이다. 1553년 보은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대곡 성운과 교유한 인물로 지금의 상현서원(象賢書院)을 창건한 인물이다.

그의 나이 2세 되는 해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당고(黨錮)의 화가 다시 세상에 일어났구나.”하고 은둔의 뜻을 품게 되었다. 17세에 서봉(西峯) 유우(柳藕)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통을 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여 수학하였다. 44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절에 맞춰 상을 마친 뒤에는 밭과 집을 홀로된 누이에게 주고 공주 선영 아래로 가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

1553년(명종 8) 48세에 유일(遺逸)로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로 임명되었고 이어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55년(명종 10)에는 삼년산성(三年山城) 안에 고을 출신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충암 김정을 독향(獨享)하는 지금의 상현서원을 창건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 보은의 사람들이 그 은덕을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또 그 선정을 책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보은현감 재직 시에는 성운을 찾아오는 남명 조식, 토정 이지함, 화담 서경덕 등과 함께 평상을 마주하고 밤을 새워가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산경(山經), 지지(地誌), 의학(醫學), 복술(卜術)에 이르기까지 정통한 인물이었다. 1559년(명종 14)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그의 덕의를 사모하여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과 창령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하였다. 보은에서는 오랫동안 생사당에 제향 하여 오다가 1681년(숙종 7)에 그가 설립한 상현서원에 배향하였으며 순조 때 창건된 금화서원(金華書院)에 배향되어 지금까지 유림들에 의하여 제향 되고 있다. 제학(提學)에 추증되고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저서로는 '동주일고(東州逸稿)' 3권 1책이 있다.

키워드 창령성씨, 상현서원, 동주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