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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최난수(崔鸞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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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의병 |
시대/생몰년 | 1543~1597 |
형태 | |
언어 | |
지역 | 음성 |
자료출처 | 음성군지(2008) |
고려 좌참찬 최유경(崔有慶)의 5세손이고, 선략부호군 우령(禹齡)의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천부적으로 강직하고 기품과 인격이 호탕하며 재능과 학식이 매우 뛰어난 영철한 사람이었다. 평생 불의와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충성과 의리와 공경의 행실이 돈독하고 화목하며 인자한 마음이 언동으로 나타나 향리 사람들이 중하게 여겼다. 처음 장사랑(將仕郞)으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초야선비로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켜 동리사람 반인후(潘仁後)를 의병장으로 추대, 「조령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반인후는 부상당했다. 그 공을 충청도우후 유림(柳霖)에게 양보하였는데, 세상 평판을 듣고 조정에서 포상하려 하자 “전에도 경학으로 제수된 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제 창의공이 있다 하여 내 어찌 공명을 바라겠느냐?”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말 채찍질하며 오다가 설성 보천과 조촌 사이 마라우(馬羅于)협곡에서 적병 1진을 만나 기습당하자 필마 단기로 힘을 다해 수백 급을 베며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 후 그곳을 「마라우(馬羅于)」라 불렀다. 그 후 임란의 공을 논공할 때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논공되었다. 일설에 나라에서 포상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였다고 함이 사실이었다.
키워드 | 충의, 임진왜란, 의병, 마라우, 선무원종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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