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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최흥림(崔興霖)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506(중종 1)∼1581(선조 14)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현좌(賢佐), 호는 계당(溪堂)이다. 해주목사를 지낸 최영유(崔永濡)의 8세손으로, 증조부는 최한정(崔漢禎)이고, 할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최중청(崔重淸),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최해(崔垓)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군수 홍여주(洪汝舟)의 딸이다. 부인은 평강채씨(平康蔡氏) 사복시 주부 채치정(蔡致禎)의 딸이다.

대곡 성운의 문인으로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육촌 조카인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밤낮으로 학문을 닦았다. 1545년 을사사화에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장단에서 보은의 금적산에 은거하였다. 이때 계당(溪堂)을 지어 종곡에 은거하던 대곡 성운, 보은현감으로 부임한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지리산에서 찾아온 남명(南冥) 조식(曺植) 등과 서로 뜻을 함께하고 밤새도록 학문을 토론하곤 하였다.

저서로는'계당집(溪堂集)'이 있고 1758년 금화사(金華祠, 금화서원)에 제향 되었다. 묘소는 수한면 광촌리에 있다.

키워드 화순최씨, 성운, 계당집, 수한면 광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