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송시열(宋時烈) |
---|---|
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607년(선조 40)~1689년(숙종 15)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옥천 |
자료출처 | 옥천군지 |
조선 중기의 학자로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이다. 고조는 송세량(宋世良), 증조는 송귀수(宋龜壽), 조부는 송응기(宋應期)이다. 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인 선산곽씨이다. 모두 5남 2녀를 두었는데, 송시열은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한산이씨로 이덕사(李德泗)의 딸이다.
아버지 송갑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에서 강원도로 피난하였다가 회덕 종가를 들러 1594년(선조 27) 선산곽씨와 혼인한 후 처가인 구룡촌에 머물렀다.
옥천에서 회덕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 소제(蘇堤) 등으로 이거하던 26세까지 살았으며 이후 주로 회덕에서 거주하였다. 이미 8세부터 회덕의 송이창(宋爾昌, 1561~1627) 집을 오가며 그의 아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2세부터는 인목대비에게 사은숙배한 죄로 삭적 후 낙향한 아버지 송갑조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우며 주자와 율곡 이이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송갑조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연산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고, 이후 김집(金集, 1574~1656)에게 배웠다. 김장생과 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김경여(金慶餘, 1596~1653)·송준길·윤문거(尹文擧, 1606~1672)·이유태(李惟泰, 1607~1684)·유계(兪棨, 1607~1664)·윤선거(尹宣擧, 1610~1669)·김익희(金益熙, 1610~1656)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27세인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당시 시험관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635년 회덕의 비래동에 서재를 짓고 강학에 힘썼으며, 그해 11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가 되어 1년 가까이 대군을 가르쳤다. 이듬해 1636년 병자호란으로 커다란 치욕을 당하자 이후 10년 가까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황간 냉천리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 즉위 후 벼슬에 나아간 후 1651년(효종 2)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658년(효종 9) 찬선(贊善)으로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로 승진한 후 효종과 함께 ‘북벌론’을 추진하였으나 1659년 효종이 급서하자 그해 12월 다시 낙향하였다.
1660년(현종 1) 좌참찬·우찬성에 올랐으나 시비가 생겨 그해 12월 사직하고 낙향한 뒤 5년간 회덕·공주·청주 등지에 머물렀다. 1666년(현종 7) 청주 화양동에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거처했다. 1672년(현종 13) 영동과 속리산을 유람하고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갔다.
1674년(현종 15)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삭출되고, 이듬해 정월 덕원(德源)·장기(長鬐)·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풀려나면서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원자 책봉을 만류하는 글을 올려 숙종의 노여움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1694년 갑술환국 다음해 문정(文正) 시호가 내려졌고,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으로 관작이 회복되고, 1744년(영조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가 태어난 이원면 용방리 구룡 마을에 유허비가 있으며, 서쪽으로 얼마 전 세워진 재실인 원덕사(遠德祠)가 있다. 유허비는 앞, 옆면 각 1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안에 있으며, 앞면에 ‘우암송선생유허(尤庵宋先生遺墟)’라 하고 뒷면에 ‘숭정후삼술이월일(崇禎後三戌二月日)’이라 하였다.
유허비 근처에 있는 경현당(景賢堂)은 송시열이 어릴 때 학문을 배우던 곳으로, 1697년(숙종 23) 영정을 봉안한 용문영당(龍文影堂)을 세웠다. 이후 용문영당은 허물어 없어지고, 경현당만 남게 되었다. 경현당 마루에 ‘경현당’과 ‘용문영당’ 편액을 같이 걸어두고 온돌방에 송시열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청산면 하서리 서원동에 1701년(숙종 27) 중봉 조헌과 함께 제향하기 위해 세웠던 덕봉서원(德峯書院) 터가 전한다.
문집으로 1717년(숙종 43)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편집, 간행한 '우암집' 167권이 있고, 1787년(정조 11) 이를 보완하여 평양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이 있다. 그 후 9권의 '송서습유(宋書拾遺)'와 1권의 '속습유'가 추가로 간행되었다.
키워드 | 은진송씨, 우암, 북벌론, 화양동, 우암집, 송자대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