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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성운(成運)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497(연산군 3)∼1579(선조 12)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할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성충달(成忠達), 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을 지낸 성세준(成世俊), 어머니는 비안박씨(比安朴氏)로 사간 박효원(朴孝元)의 딸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백악산 자락에서 은거하던 성수침(成守琛)은 그의 사촌 형이고, 기호학파의 원류가 된 성혼(成渾)은 그의 당질(堂姪)이다.

평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1531년(중종 26)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1542년(중종 37)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사직서(社稷署) 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그의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이후에는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처향(妻鄕)인 보은 종곡(鍾谷)에 가서 은거하였다. 보은 종곡은 경주김씨의 세거지로 성운의 부인은 김벽(金碧)의 딸이었다. 성운은 후사가 없어 처형(妻兄)인 김천부(金天富)의 다섯째 아들 김가기(金可幾)를 어려서부터 키우고 가르쳤으며 장성하자 을사사화에 죽은 형 성우(成遇)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후사(後嗣)를 부탁하였다.

성운은 1553년(명종 8)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어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 근무하다가 물러난 이후 일생의 대부분을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활동을 했고, 조식(曺植), 이지함(李之菡), 성제원(成悌元), 서경덕(徐敬德) 등과 깊은 교분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들이 성운이 은거했던 보은의 속리산에 모여 회동을 하였음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성운이 속리산에 은거하면서 거문고와 책으로 스스로 즐겼다. 조식이 일찍이 찾아왔는데 성제원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조식과 공은 비록 초면이었으나 친함이 옛 친구와 같았고 서경덕, 이지함이 또한 동행해 와서 함께 수일을 즐겼다.”라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교유했던 인물 중 성운과 가장 친밀했던 벗은 조식으로, 이들은 젊은 시절 서울에서 인근에 함께 살았으며, 백악산에 은거했던 종형 성수침으로 인하여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성운의 문집인 『대곡집』과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에는 이들이 주고받은 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두 사람이 교환한 편지가 다수 발견된다.

성운은 스스로는 어느 당색(黨色)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의 학풍과 처세는 북인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는 조식이나 서경덕과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보은의 속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그와 학문적 인연을 맺은 중요 인물로 최흥림(崔興霖)ㆍ임제(林悌)ㆍ김덕민(金德民) 등이 있다. 최흥림은 을사사화 이후 보은에 들어와 처사에 입지를 지킨 인물로 스스로가 대곡의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두 아들인 최지원(崔知遠)과 최명원(崔明遠)을 대곡의 문하에 들어가게 하였다. 또한 그의 학풍과 처세는 임제(林悌)에게 영향을 주었다. 임제는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詩風)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성운의 학문을 계승한 임제는 그의 외손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학풍 형성에 영향을 주어 허목의 도가적 학풍 형성에 일조하였다.

성운의 학풍은 성리학자로서의 마음의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고 있으나, 은일적(隱逸的)․노장적(老莊的)인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귀와 마음이 어두워져서 짚과 나무로 엮어 만든 허수아비와 같으므로 호를 ‘허부(虛父)’로 삼는다고 한 후에 허수아비를 통해 세태를 풍자한 <허부찬(虛父贊)>이나 <취향기(醉鄕記)>에 노장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성운은 속리산에 은거하는 처사의 삶으로 일관했지만 현실정치에 완전히 인연을 끊은 현실 은둔자는 아니었다. 1553년에 가뭄이 크게 들자 그 대책을 제시한 글인 <대한부(大旱賦)>와 인사 비리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인 <답우(答友)> 등의 단문에는 그의 정치관, 사회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성운은 당대 및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온화하고 엄정하게 처사의 입지를 지킨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남 칭찬 않기로 유명한 조식도 “건숙은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아서 내가 따르지 못한다.”라고 극찬하였으며, 실록에서는 “온아하고 간묵(簡黙)하며 초연히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겸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켰다.”라고 평가하였다.

성운이 세상을 떠난 뒤 선조는 제문을 내려 애도하였으며, 뒤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910년에는 정이품의 품계를 주고 규장각(奎章閣) 제학(提學)으로 추증하는 동시에 문각(文恪)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현재 성운은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보은 금화서원(金華書院)에 제향 되어 있으며, 저서로는 『대곡집(大谷集)』 3권 1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묘소와 묘갈은 보은읍 성족리에 있으며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었다.

키워드 창녕성씨, 대곡집, 보은읍 성족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