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한원진(韓元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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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682~1751 |
형태 | |
언어 | |
지역 | 충주 |
자료출처 | 충주시지 |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이며,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의 아들이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숙종 43년(1717)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경종 1년(1721)에 익위사(翊衛司) 부솔(副率)이 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했다. 영조 1년(1725)에 경연관(經筵官)에 뽑혀 진강(進講)하고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에 맹자(孟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 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削職)되었다. 17년(1741)에 김재로(金在魯)의 도움으로 복직되어, 뒤에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권상하의 제자들인 강문8학사(江門八學士) 중에서도 이간(李柬)과 함께 가장 유명했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 낙론(洛論)인 이간의 주장에 반대하고, 인·물·성이 부동함을 주장했다. 뒤에 권상하가 그의 학설을 지지함으로 논쟁이 확대되어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양분되었다. 그가 살던 호서(湖西)를 따서 그를 지지하는 파를 호론(湖論)이라 하고 그 영수가 되었다.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했다. 그의 많은 저서 중 영조 17년(1741)에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유학사상(儒學史上)의 거작이다. 천문·지리·병학·산수에도 통달했다. 저서로는 『남당집(南塘集)』이 있으며, 수많은 편서(編書)가 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문순(文純)이라 시호했다. 윤봉구(尹鳳九)가 지은 행장(行狀)이 있으며, 결성(結城)의 사곡사(賜谷祠)에 제향되고 있다. 묘소는 충남 홍성군 사곡리 명호원(明湖原)에 있다.
키워드 | 한원진, 덕소, 남당, 청주 한씨, 한상경, 한유기, 권상하, 영릉참봉, 신임사화, 호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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