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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구수복(具壽福)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491(성종 22)∼1535(중종 30)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 자는 백응(伯凝), 호는 병암(屛庵)․수재(睡齋)이다. 할아버지는 병조참의 구신충(具信忠), 아버지는 참판에 증직된 구이(具頤)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현감 이의영(李宜榮)의 딸이다. 부제학을 지낸 구수담(具壽聃)의 형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인은 단산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 딸이다.

일찍이 조광조․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 등과 서로 가르치고 이끌며 학문을 닦았다. 1510년(중종 5) 생원에 급제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제수되었다가 곧 검열에 천거되었다. 이후 주서(注書)․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저녁 이조에서 숙직을 서고 있으면서 심정(沈貞) 등으로부터 북문을 열라고 협박당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을 파직하기를 청하였을 때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이르러 “만약 사관을 다 파면하면 오늘날 기주(記注)는 누가 담당해 닦으오리까?”하며 항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 등을 치죄할 때 왕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성운(成雲)을 승지에 임명하자 그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는 등 사림파의 성향을 띠어 파직을 당하였다.

파직당한 후 가족을 이끌고 상주로 이사하였는데 이때 김정과 친분이 두터운 김태암(金泰巖)의 주선으로 보은의 구병산 아래에 와서 살았다. 당시 김태암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향 보은에 내려와 생활하고 있었으며, 구수복은 김정의 벗이라면 어진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뜻을 받아들여 그곳에 정착한 것이다.

이후 1533년 가을에 이준경(李俊慶)과 아우 구수담 등의 힘으로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서용되었으나 재직 중에 죽었다.

그는 김정 등과 도의(道義)로써 사귀고 경학(經學)에 몰두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의 성품은 겉으로는 온화한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강의(剛毅)하여 의롭지 않은 일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아 다른 이들이 존경하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799년(정조 23)에 유림의 상소로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묘소는 마로면 관기리에 있다.

키워드 능성구씨, 김정, 병산서원, 마로면 관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