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김세필(金世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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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문신 |
| 시대/생몰년 | 1473~1533 |
| 형태 | |
| 언어 | |
| 지역 | 충주 |
| 자료출처 | 충주시지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이라 했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첨정(僉正) 김훈(金薰)의 아들이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아 닭이 울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한다. 성종 22년(1491) 성종이 친히 유생들에 시험을 보일 때 18세로 수석이 되니 기특히 여겨 많은 상품을 주었다. 연산군 1년(1495)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박사를 거쳐 수찬(修撰)이 되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올랐다.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 1년(1506)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홍문관 응교로 기용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었다. 뒤에 전한(典翰)·형조참판·부제학을 거쳐, 11년(1516)에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며, 이어 전라도관찰사와 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을 지내고, 14년(15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 겨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가 사사(賜死)되자, 그 부당함을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 17년(1522)에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금의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八聖里)에 십청헌을 지어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니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이 무렵 충주목사로 있던 박상(朴祥)이 집 짓는 일을 도왔으며, 매년 봄에 조곡 100석을 보내와 후원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것이 49세요, 50세에야 그릇됨을 알았다(行年五十而知四九年之非)하여 호를 지비옹(知非翁)이라 하고, 그 집 앞에 흐르는 물을 지비천(知非川)이라 했다고 한다. 묘소는 용인 죽립리(竹笠里)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쓴 신도비가 있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과 음성의 지천서원(知川書院)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지천서원 앞에 십청헌유허비(十淸軒遺墟碑)가 있다. 저서로『십청헌유고(十淸軒遺稿)』가 있다.
| 키워드 | 김세필, 경주 김씨, 김훈, 사가독서, 지비옹, 십청헌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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