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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최수성(崔壽峸)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487(성종 18)∼1521(중종 16)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선비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고조는 병조판서를 지낸 최안린(崔安隣), 증조는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치운(崔致雲), 할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이다. 어머니는 승지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9세에 이미 문예(文藝)가 갖추었다고 하며, 13세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조석으로 직접 음식으로 준비하고,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을 하루 같이 죽을 먹고 시묘를 하는 등 효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상복을 벗고 나서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과거 공부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평소 산수(山水)에 대한 취미가 있어 지리산, 속리산, 가야산 등 명산을 유람하였으며, 더욱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畵), 음악 등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평소 남곤(南袞)의 무리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때 이들이 사림파를 뒤에서 조정하였다는 죄목을 얽어 극형에 처한 것이다.

그는 문장․시․서화․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인물로, 한때 마로면 관기리에 있는 고봉정사(孤峯精舍)에서 김정, 구수복 등과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또한 마로면 원정리(猿汀里)라는 지명은 그가 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강릉의 향사(鄕祠)에 제향 되었다.

키워드 강릉최씨, 조광조, 김정, 마로면 원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