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법경대사(法鏡大師) 현휘(玄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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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 승려 |
| 시대/생몰년 | 879~941 |
| 형태 | |
| 언어 | |
| 지역 | 충주 |
| 자료출처 | 충주시지 |
신라 말 고려 초의 고승(高僧)이다. 속성(俗姓)은 이(李)씨, 덕순(德順)의 아들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어머니는 전(傳)씨로 꿈에 한 선인(仙人)으로 부터 학(鶴) 한 마리를 얻은 태몽으로 임신 13개월 만에 태어났다. 현휘(玄暉)는 법명이다. 나면서 성스런 용모를 지녔으며 어른스러워 보통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앉을 때는 합장가부(合掌跏趺)를 잘하고, 모래에 그리고 돌을 쌓아 상탑(像塔) 만들기를 취미로 하고, 벌레와 물고기에게 자기 밥을 나누어 주며 물도 잘 주었다. 부모에게 출가할 것을 청하여 영동(嶺東)의 영각산사(靈覺山寺)에 들어가 심광대사(深光大師)를 만나 수도하고, 효공왕(孝恭王) 2년(898)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에 들어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계주(戒珠) 유명(愈明)하고 도행(道行)이 날로 높아갔다. 뒤에 동료 10여 인과 난을 피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로 가서 살았다. 이곳에서 도적의 습격을 받았으나 현휘는 번득이는 칼 앞에서 신색(神色)이 태연하고 두려움이 없이 도적에게 사람됨을 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니, 도적들이 절을 하며 제자가 되기를 청함으로 제자를 삼았다. 이런 일이 알려지자 대사에게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효공왕 10년(906)에 홀로 배를 청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팽택(彭澤)을 지나 구봉산(九峯山)에서 도건대사(道乾大師)의 허락을 받아 10여 일의 참선으로 심요(心要)를 받았다. 10여 년 동안 각지를 두루 편력하니 경치가 빼어난 곳은 빠짐없이 찾아다녔으며, 수려한 산에는 반드시 머물렀고, 성스러운 유적을 찾아 선백(禪伯)을 참배했으니, 남쪽으로는 호서(湖西), 북은 유연(幽燕), 서쪽은 공촉(邛蜀)에 이를 정도였다. 사명산(四明山)에 이르렀을 때 새 한 마리가 서신을 물고 와 전하니, 고려(高麗)가 건국하여 평온을 되찾았다는 소식이라 태조 (太祖) 7년(924)에 귀국했다. 태조는 특별히 사신을 보내 국사(國師)의 예를 갖추어 모셨다. 뒤에 충주의 정토사(淨土寺)에 머물게 했다. 이곳에서 선교(禪敎)에 진력하니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자가 구름같이 몰려왔다. 지방의 명류(名流)뿐만 아니라 조정의 사류(土流)들도 내왕이 많았다. 대사는 이곳에서 종지(宗旨)를 크게 펴서 명성을 떨쳤다. 태조 24년(941) 11월 26일 입적(入寂)했다. 입적에 앞서 제자가 묻기를 “대사가 죽으면 법통은 누구에게 계승시킬 것입니까?" 하니, “등마다 동자(童子)가 있어서 스스로 밝힐 것이다”고 대답했다. “동자가 누구입니까?” 하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청천하늘에는 별이 많다.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좌멸(坐滅)했다. 속년(俗年) 63세에 승랍(僧臘) 41년이었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산천이 진동하며 새와 짐승이 울고 모든 사람이 애통해했다. 제자(弟子)와 활행(闊行) 등 300여 인이 받들어 그달 28일에 북봉(北峯)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애도하며 시호를 법경대사(法鏡大師), 탑호(塔號)를 자등(慈燈)이라 하고, 문신(文臣) 최언위(崔彦爲)에게 비명(碑銘)을 짓게 하고 구족달(具足達)이 글씨를 쓰게 하여 태조 26년(943)에 비를 세웠다. 이 비는 보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 315cm 폭 142cm의 거대한 모습으로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다. 자등탑(慈燈塔)은 일제하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전해질 뿐 행방을 알 수 없다.
| 키워드 | 법경대사, 현휘, 심광대사, 도건대사, 정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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