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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윤지술(尹志述)
분류 유생
시대/생몰년 1697~1721
형태
언어
지역 진천
자료출처 진천군지

조선(朝鮮) 후기의 유생(儒生), 윤정신(尹挺莘)의 고손(高孫)으로 자(字)는 노팽(老彭)이며 호(號)는 북정(北汀)이라 하였다.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1715년(숙종 41)에 유계(兪棨)의 저서(著書)인 《가례원류(家禮源流)》서문(序文)을 쓴 노론(老論)의 권상하(權尙夏)가 소론(少論)의 유규(柳奎) 등 8백여 명의 상소로 삭직되자, 윤지술은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으로서 《가례원류》의 시비에 대한 전말을 논하여 권상하의 신구(伸救)를 상소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에 성균관(成均館) 장의(掌議)로서 숙종이 죽자 숙종의 지문(誌文)이 또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상소하고 유생들을 선동하여 동맹휴학(同盟休學)을 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의 탄핵으로 사형 당했다. 윤지술은 진천군(鎭川郡) 만승(萬升) 내촌리(內村里)에 살았으며 자주 왕래가 있었다. 매우 지조(志操)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니 임창(任敞), 이의연(李義淵)과 함께 신임의 삼포의(三布衣)로 일컬어진다. 1725년(영조 1) 에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신원(伸寃)되었으며, 1802년(순조 2)에 사현사(四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1841년(헌종 7)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정민(正愍)이라 시호하였다.

키워드 윤지술, 윤정신, 노팽, 북정, 칠원 윤씨, 가례원류, 권상하, 신임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