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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전팽령(全彭齡)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480년(성종 11)∼1560년(명종 15)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옥천
자료출처 옥천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숙로(叔老)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며 본관은 옥천이다. 전오례(全五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효순(全孝順)이고, 아버지는 참판 전응경(全應卿)이며, 어머니는 좌사간 김사렴(金士廉)의 손녀이다.

태어난 지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의고서 어머니를 의지하며 성장하였으며, 학문에 힘쓰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24년(중종 19)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와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한 뒤, 이어서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성균관사성·통례원우통례·평안평사·단천군수, 삼척과 밀양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531년(중종 26)에 북평사로 나갔을 때는 상관인 병마사 이사균(李思均, 1471~1536)이 그의 정직함 때문에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으며 단천군수로 부임하였을 때는 고을의 관리들이 은자 수백냥을 책상 위에 놓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古規)”라 하니 즉시 가져가라고 명하여 부정을 못하게 하였다. 또 삼척부사로 있을 때에는 아름다운 풍속을 널리 펼치고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1550년(명종 5)에 상주목사로 있을 때에도 역시 청렴한 치정을 하여 청백리의 별칭인 염근(廉謹)에 선발되어 통정(通政)에 특별 승진되었다.

곧이어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떠났다가 1559년(명종 14)에 나이 80세가 된 까닭에 또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6월에 병이 들어 별세하였고, 8월에 고라산(高羅山)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천성(天性)이 순후(醇厚)하여 자신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을 상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대하였고, 특히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제사 때만 되면 반드시 몸소 제수(祭需)를 갖추어 올렸는데, 비록 나이가 늙어 병이 들었을 때에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형제들과 더불어 재산 관리와 부모 봉양을 함께 하였고, 여러 조카와 손자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게 보살펴 주었으며, 살림이 궁색한 사람이나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어 도와주는 일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양식이 한 섬 정도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 만년에는 벼슬을 내던지고 집에 돌아와서는 산수(山水)를 벗삼아 즐기며 살았으며, 조정에서 누차 현직(顯職)에 제수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하였다. 항상 친구들과 서로 즐겁게 유람하며 지냈는데, 거의 10년 동안을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첫 부인은 생원(生員) 이국형(李國衡)의 딸로 1남 전엽(全燁)을 낳았는데, 1543년(중종 38)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후취(後娶)는 김축(金軸)의 딸로, 딸 하나를 낳아서 생원 정유건(鄭惟謇)에게 시집갔다.

동이면 금암리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양신정’이 있는데 달리는 ‘전송정(全松亭)’이라고 한다. 이 곳은 전팽령이 밀양부사로 있을 때 퇴직 후 쉬기 위한 장소로 지었다고 한다. 1545년(인종 1)에 세워진 정자는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0년(광해군 12)에 중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서쪽 한 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나지막한 흙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후손들이 조상의 유적을 아끼느라 단청(丹靑)하여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정자 서편 담장 밖에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상수리나무 노목이 울창하고, 소나무 숲이 정자를 둘러싸고 있다. 정자를 처음 지을 때의 사정을 전하는 『양신정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이것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우찬성까지 지낸 소세양이 기록한 것이다.

한편, 정자 서편 낮은 곳에 늪이 있는데 전에 따오기가 살았다고 해서 목담(鶩潭)이라 하며, 남쪽에는 목담영당(鶩潭影堂)이라 이름한 사당(祠堂) 건물이 자리한다. 양신정은 송정의 정신이 깃든 문화재로 후생들로 하여금 충효정신을 고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는 강당의 역할을 했으며 이곳에서는 그의 고결한 인격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3월 중정날에 제를 올리고 있다.

키워드 옥천전씨, 송정, 조선 중기 문신, 양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