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이공승(李公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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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신 |
시대/생몰년 | 1099 ~ 1183 |
형태 | |
언어 | |
지역 | 진천 |
자료출처 | 진천군지 |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태조(太祖) 때의 공신(功臣) 이겸선(李謙宣)의 5대(代) 손이다. 자(字)는 달부(達夫)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문장이 탁월하였다. 인종(仁宗)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며 벼슬이 올라서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다.
1148년(의종 2)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로서 사신이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이때에 금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는 자는 관하군(管下軍)의 은(銀)을 한 근씩 취하였는데 이승공(李升公)은 일전도 취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왕(王)이 청녕재(淸寧齋)에서 달밤놀이를 하는 데서 “가을 달이 맑게 개어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정히 이승공의 가슴 속과 같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벼슬이 올라서 우승선(右承宣)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다. 이때에 왕이 환관(宦官) 정함(鄭諴)을 추천하는 고신장(告身狀)에 서명하기를 독촉하니 부득이 이에 서명하였다. 뒤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를 역임했다. 이 때에 왕은 이승공과 송청윤(宋淸允)·오충정(吳忠正) 등을 불러 말하기를 “정함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신근(辛勤)하게 보호하여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祇候)를 시켜서 그 노고를 보답하려 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경(卿) 등이 고신장에 서명하지 않음은 실로 왕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다. 만약에 서명치 않으면 모두 죽여서 젖을 담을 것이다.” 하니 오충정과 송청윤은 엎드려 땀을 흘렸으나 이승공은 뜻을 받들지 않았다. 얼마 후에 왕이 대간(臺諫)을 불러 정함의 고신장에 서명을 요구하니 모두가 이에 응했으나 이승공은 거절하였다. 왕이 “너는 일찌기 간관(諫官)이 되어 이미 정함의 고신장에 서명한 바 있는데 이제 서명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신(臣)은 인물(人物)의 됨됨으로 보아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조서를 받들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한때 노하여 이승공을 물리쳤으나 그의 뜻을 알고 다시 불러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올렸다. 1165년(예종 9)에 왕이 친히 대전(大廟)에 제사 지내는데 이승공이 제사 준비가 다 마련되었다고 하여, 왕이 묘정(廟庭)에 들어가보니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책(責)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좌천시켰다. 또한 예종이 관북궁(館北宮)에 굴실(窟室)을 만들고 대(臺)를 쌓아 금옥(金玉)으로 사치하게 장식하고 관(官), 궁견(宮女)들과 더불어 가무연락(歌舞宴樂)에 빠져 국정(國政)을 소홀히 하매 이승공은 “공명(功名)과 부귀(富貴)가 모두 꽃 밑의 삼배(三盃) 술자리에 모였다.”라고 작시(作詩)하여 왕을 경계하는 등 강직한 인품이었다.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으며, 116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공부사(判工部事)로서 치임(致任)하였다. 이후 전원(田園)에 초가(草家)를 짓고 못을 파고 동산을 쌓아 꽃나무를 심고 폭건(幅巾) 예장(藝杖)(지팡이)으로 그 사이를 한가히 노닐며, 빈객이나 자제가 와서 보는 자가 있으면 곧 시주(詩酒)로서 즐겼으며 나물, 과실로 반찬을 하였을 뿐이었다. 1170년(예종 24) 경인(庚寅)의 난(亂)(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 많은 문신(文臣)들이 화를 입었으나 잘 피했다. 1173년(명종 3) 계사(癸巳)의 난 때에는 이의방(李義方)이 또한 문신을 찾아 죽일 때에 그의 문하생(門下生)인 문극겸(文克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175년에 명종은 이승공의 구덕(舊德)을 높여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제수하였고 1183년(명종 13) 85세에 죽으니 문정(文貞)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이승공은 수염이 아름답고 동안(童顔)으로 늙어 보이지 않았으며, 조행(操行)이 고결하고 생산(生產)을 일삼지 않았으나, 성품이 경환(輕環)하여 능히 남의 허물을 용납치 못하고 보기만 하면 곧 만(慢)하였다. 진천군(鎭川郡) 문백면(文白面) 사양리(思陽里)에는 그의 영당(影堂)이 있다. 이 영당은 1726(영조 2)에 그려진 것으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홍성(洪城) 화신리(花新里)와 경북(慶北) 성주군(星州郡) 가천면(伽泉面) 창천동(倉泉洞) 구순산(口淳山) 아래의 추월재(秋月齋)에도 각각 영당이 있다.
키워드 | 이공승, 예종, 계사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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