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김유신(金庾信) |
|---|---|
| 분류 | 무신 |
| 시대/생몰년 | 595 ~ 673 |
| 형태 | |
| 언어 | |
| 지역 | 진천 |
| 자료출처 | 진천군지 |
신라통일기(新羅統一期)의 명장(名將)으로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다. 가락국(駕洛國)의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3世 손이며 증조부(曾祖父) 구해왕(仇亥王)(혹은 구형(仇衡))이 나라를 들어 532년(신라 법흥왕(法興王) 19)에 신라에 부항(附降)하였다. 조부(祖父) 김무력(金武力)은 각간(角干)에 이르렀으며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만명(萬明)이라 하였으며 진흥왕(眞興王)의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김서현이 만노군(萬弩郡)(진천)의 태수(太守)가 되어서 형혹(熒惑), 진성(鎭星)의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온 꿈을 꾸고 임신하여 20개월만인 595년(진평왕(眞平王) 17)에 김유신(金庾信)을 낳았다.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났으나 그 후 아버지를 따라 경주(慶州)로 가서 성장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에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으로 심신(心身)을 수련(修鍊)하였다. 611년 나이 17세에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적을 소탕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혼자 중옥(中獄)의 석굴(石窟)에 들어가 제계(齊戒)를 하고 하늘에 고하며 맹서하여 나흘 동안 하늘에 빌면서 비상한 술법(術法)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난승(難勝)이라고 하는 노인(老人)이 나타났다. 이에 유신은 “나는 신라 사람인데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파 여기 와서 신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빌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방술(方述)을 내려주옵소서.”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였다. 그러자 그 노인은 드디어 소년(少年)의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하려는 강한 마음을 칭찬하며 비법(秘法)을 내려주고는 “이것을 함부로 쓰지 말지어다. 만약 이것을 불의(不義)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 이듬해 백제의 공격이 심하자 유신은 더욱 격분하여 홀로 보검(寶劍)을 가지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계곡에 들어가서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며 삼국통일의 숙원(宿願)이 이루어지기를 빌었다. 이윽고 하늘에서 빛을 내려 보검에 강령(降靈)하였고 사흘째 되던 밤에는 허숙(虛宿), 각숙(角宿)의 두 별빛이 밝게 내려와 비치니 보검은 약동을 하여 영감을 얻은 듯하였다. 629년(진평왕 51)에 위와 같이 수련을 쌓아 온 김유신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는데 첫 출전(出戰)을 하였다. 이 때에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아버지인 소판 김서현, 파진찬(波珍飡) 용춘(龍春)(김춘추(金春秋)의 부(父))등 선배 장군들의 지휘하에서 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구려병이 공격을 가해 오므로 전세가 불리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많이 나오고 사병들의 투지(鬪志)가 약화되었다. 이 때 김유신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수범(垂範)을 보이겠다고 고(告)하고는 솔선하여 칼을 빼어들고 말을 달리며 적진(敵陣)에 돌입하여 적장(敵將)을 베어 그 목을 들고 왔다. 신라군은 이에 기운을 얻어 분격(奮擊)하여 5천여 급을 베고 천여 명을 생포하니 성중(城中)의 군사(軍士)들이 겁을 먹고 다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위명(威名)은 점점 나라 안팎에 떨치게 되었다. 642년(선덕왕 11)에 백제는 신라의 서부(西部) 40여성(餘城)을 빼앗고 또 대양주(大梁州)를 공파(攻破)하였으니 이 때에 김춘추의 사위 품석(品釋)부부가 전사(戰死)하였다. 김춘추는 이를 한(恨)하여 고구려에 청병(請兵)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왕의 허락을 받고 고구려로 떠날 때 김유신과 굳게 약속을 하되 60일이면 돌아오겠다 하고 떠났다. 고구려의 보장왕(寶藏王)은 김춘추의 청병의 말을 듣고는 “마목현(麻木峴)(계립)과 죽령(竹嶺)은 본시 고구려의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고 하니 김춘추는 이는 왕(王)이 결정하는 문제이니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김춘추를 연금하였다.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김춘추는 고구려의 신하(臣下) 선도해(先道解)에게서 별주부전의 이야기를 듣고는 토기의 간계(奸計)를 빌어서 고구려왕의 환심을 샀으니 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60여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3천의 군사를 뽑아 고구려의 변경으로 쳐들어갈 것을 왕에게 청하여 기일을 정하였다. 고구려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춘추의 간계를 믿고 있었던 터라 후한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김유신은 644년(선덕왕 13) 소판(蘇判)이 되었으며 9월에는 왕이 상장군(上將軍)을 삼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성(城)을 치게 하니 크게 이기고 다음해 정월에 돌아왔는데 미처 왕에게 복명할 사이도 없이 백제의 대군(大軍)이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해 왔다는 급보(急報)로 왕은 곧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것을 치게 하였다. 유신이 명을 받들고 妻子도 못 보고 떠나 백제군을 역격(逆擊)하여 쫓아내고 2천여 급을 베었다. 이리하여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다시 백제군이 국경(國境)에 출둔(出屯)하여 장차 크게 침입하려 한다는 급보로 왕은 김유신에게 청하되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곧 출격하여 적을 미리 방비하라고 하니 유신은 또 집에 들리지 않고 군병을 거느리고 서(西)쪽으로 행군(行軍)하였다. 이 때에 김유신은 집 문앞을 지나치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50걸음쯤 가다가 말을 멈추고 집의 장수(漿水)를 떠오게 하여 마신 후 물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떠나니 군중(軍衆)이 이를 보고 “대장군(大將軍)도 이와 같거늘 우리들이 어찌 이별하는 것을 한하랴”하고 싸움터에 이르니 백제군은 신라의 군졸(軍卒)을 보고 감히 공격치 못하고 물러갔다 한다. 646년(眞德王 1)에 비담(毘曇) 등의 난(亂)을 진압하는데도 큰 지략으로 평정하였다. 이듬해에 김춘추는 드디어 당(唐)에 들어가 백제를 치기 위해 청병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은 이때에 김유신의 사람됨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유신에게 재지(才智)가 좀 있으나 귀국(貴國)의 위(威)를 빌지 않고서 어띠 이웃의 환(患)을 제거(除去)하겠습니까?”하고 김춘추가 겸손하게 대답하니 태종은 쾌히 승낙하고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20만(萬)으로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로서 왕에게 청하여 대양주(大梁州)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백제의 장군 8명을 포로로 하고 1천명을 베었다. 여기에서 유신은 백제 측에 고하여 앞서 전사한 품석 부부의 유해와 8명의 장군과 교환하고는 승리의 기세로 백제 깊숙이 진격하여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2만 명을 베고 9천명을 포로로 하였다. 이 큰 전공(戰功)으로 이찬(伊湌)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또다시 백제의 진예성(進禮城) 등의 9성을 공격하여 함락(陷落)시키고 9천여 명을 참하였다. 649년(진덕왕 3) 8월에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와서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여 오니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진춘(陳春)・천존(天存) 등에 명하여 나아가 방어케 하니 3군을 5도(道)로 나누어 공격하여 은상 이하 만여 명을 죽이고 말 만 필, 갑주 천팔백 벌과 기타 많은 기계를 노획하였다. 또한 개선 도중에 1천명을 인솔한 백제 좌평(佐平) 정복(正福)의 항복을 받았다. 서울에 이르니 왕이 문에 나와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이 654년에 죽자 김유신과 알천공(閼川公) 등의 추대로 김춘추가 왕위(王位)에 올랐으니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다. 659년(무열왕 6)에 김유신은 왕을 설득하여 또다시 당에 청병한 결과 드디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듬해 6월 당나라에서 소정방과 류백영(劉伯英) 등이 1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황해(黃海)를 건너 덕물도(德物度)(덕적도)에 이르렀다. 신라에서는 태자(太子) 법민(法敏)과 김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이 대선(大船) 백여 척에 병사를 싣고 마중하였다. 여기서 양군(兩軍)은 약속을 정하여 7월 10일을 기하여 신라는 육로(陸路)로, 당은 수로(水路)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부여)을 협공하기로 하였다. 김유신은 지금 옥천의 탄현(炭峴)을 넘어서 부여로 진격할 때 황산(黃山)(연산(連山))벌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이 군사 5천과 마주쳤다. 신라군은 네 번이나 공격하였으나 모두 패하여 물러섰다. 이때에 흠순(欽純)(김유신의 의자(義子))의 아들 반굴(盤屈)과 품일(品日)의 아들 관창(官昌)이 어린 몸으로 적진에 돌진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본 신라군은 용기를 내어 맹격(猛擊)하여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이와 같은 격전으로 시일이 걸려 약속한 기일에 당군의 진영(陣營)에 가지 못하였다. 당의 소정방은 신라군이 늦은 것을 책망하고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참수(斬首)하려 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크게 분노하여 황산벌의 격전을 설명하면서 “늦은 이유를 들어 죄를 지우려 하나, 허물없이 욕을 받을 수는 없다. 정히 그렇다면 먼저 당군과 결전하고 뒤에 백제와 싸우리라.”고 하니 소정방은 당황하여 김문영의 죄룰 풀었다고 한다. 김유신은 자신을 지원 온 소위 천병(天兵)이라 하더라도 부당(不當)한 처사에까지 굽히는 비굴을 참을 수 없었던 강한 주체(主體)의식이 있었고, 이것이 당시 신라인의 기백이었다. 이리하여 신라군은 서로 호응하여 12일에 사비성을 포위하고, 그 다음날에 함락시켜서 백제 토평(討平)의 목적(目的)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그후 백제유민(百濟遺民)의 부흥운동(復興運動)이 자못 치열하여 당군은 류인원(劉仁願)을 진장(鎭將)으로 주둔시켜서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663년(문무왕 3)에 가서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군의 출병으로 완전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한편 당군은 백제를 멸(滅)한 후에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등 5도독(都督)을 두어 직접 군정(軍政)을 베풀고자 하였으며, 신라의 왕도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임명(任命)하여 반도(半島)를 지배(支配)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날카로운 반발을 보여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정방은 또한 백제의 땅을 김유신・인문・양원의 3장군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제멋대로 식읍(食邑)으로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에 김유신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물리치니 당군은 사비의 언덕에 진을 치고 신라까지 침범(侵犯)할 음모를 꾸몄다. 이 사실을 알게된 김유신은 적극적으로 당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강자(强者) 앞에서라도 부당하게 굽히지 않는 김유신의 기백이 또 만인의 모범이 되었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당은 소정방에게 고구려 침공(侵攻)을 명하고 신라에도 호응할 것을 통고해 왔다. 이에 김유신이 대장군이 되어 신라의 전 군단(軍團)을 동원하고 왕이 친히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남천주(南川州)(이천(利川))로 북진(北進)하였다. 이때에 백제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瓮山城)에 웅거하여 길을 가로 막았으나 김유신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때 백제를 진수(鎭守)하던 류인원의 군도 사비를 떠나 남천주에 이르렀으니 신라군은 합세(合勢)하여 북으로 진발(進發)하였다. 이때에 소정방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구(大同江口)에 상륙하고는 육군의 지원을 얻지 못해 고립되어 군량(軍糧)보급이 곤란하자 신라에 이것을 청하여 왔다. 신라에서는 왕이 군신(群臣)을 소집하에 적이 진중(陣中)을 뚫고 어떻게 군량을 수송할 것인가를 논하는데 김유신이 나서서 노신(老臣)이 이제 충절을 다할 때라고 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적중(敵中)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왕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의 현명한 보필(輔弼)을 얻어 걱정할 바가 없겠으니 공의 공덕을 어느 날엔들 잊으리오.”라고 말하였다. 이때 김유신은 67세의 노령(老齡)이었다. 유신은 왕명을 받고 군병을 이끌고 군량을 싣고 고구려의 지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정방의 당군은 이미 고구려와 싸워 전의를 상실하고 군량을 가지고 철군하여 버렸다.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사력(死力)을 다해 당군과 내회(來會)한 김유신군도 아무 보람없이 신라에 들어와야 했다. 고구려에서도 요처(要處)에 복병을 숨겨 회군(回軍)하는 김유신의 군을 공격하였으나 위기를 극복하며 용전(勇戰)하여 저경 1만여 급을 베고는 돌아왔다. 왕은 후한 상을 내리고 위로하였다. 668년(문무왕 8) 6월 신라는 또다시 총군을 동원하여 당군과 호응하여 평양(平壤) 함락을 위해 참전하였다. 김유신은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풍증(風症)으로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흠순(欽純)과 인문(仁問)에게 용병(用兵)의 계략(計略)을 내려주고 전군 지휘(指揮)를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대군은 문무왕의 통솔하에 고구려로 진격하여 9월 21일 당군과 더불어 평양성을 공취(攻取)함에 이르렀고 드디어 고구려는 평정(平定)되었다. 문무왕은 군사를 돌이켜 남한주(南漢州)에 이르렀다. 왕은 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진력(盡力)하던 부왕(父王)인 무열왕(武烈王)이 오늘을 보지 못한데 대한 감개가 심하였다. 또한 그와 일치가 되어 일했던 칠순의 김유신을 생각하고는 군신들에게 “옛날 백제의 명예왕(明禮王)(성명왕(聖明王)이 고리산(古利山)에서 우리를 침범하고자 할 때 유신의 조부 무력(武力) 각간(角干)이 이를 무찔러 그 왕과 많은 사졸(士卒)을 붙잡아서 그 선봉(先鋒)을 꺾었고, 아버지 서현은 양주총관(良州摠管)이 되어 또 여러 차례 백제를 공격하여 그 침공을 막아내서 변민(邊民)이 농상(農桑)의 업(業)을 안심하고 계속하게 되고 임금의 근심을 없애게 하였는데, 지금 유신은 조노(祖老)의 업을 이어서 나라의 중신(重臣)이 되어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공적이 많다. 공의 일문(一門)에 힘을 입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興亡)은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 직상(職賞)을 어찌 하였을 좋을 것이냐.”고 하문(下問)하니 군신들도 왕지(王旨)와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에 왕은 태대서발한궁중(太大舒發翰宮中)에서 특별한 대우를 하게 하였다. 한편 당나라에서도 금백(金帛)과 조서(詔書)를 보내 왔다. 673년(문무왕 13) 79세에 병을 얻어 별세(別世)하였으니 7월 1일이었다.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는 슬퍼하며 채백(彩帛) 1천 필(必)과 조(租) 2천 석을 보내어 상사(喪事)를 극진하게 하였다. 묘(墓)는 금산원(金山原)에 썼다. 지금 경주 서교(西郊)인 서악(西岳)의 북쪽 능상(陵上)에 12지신상(支神象)을 조각한 병풍석(屛風石)을 돌리고 앞에 문무인석(文武人石)을 도열시킨 왕릉급(王陵級)인 묘는 그 위치로 보아 김유신의 묘임에 틀림이 없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기공비(紀功碑)를 세웠다고 하였으나 남아있지 않다. 835년(흥덕왕 10)에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5남(男) 4녀(女)가 있으니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과 서자 군승(軍勝)이 있다. 충북(忠北) 진천(鎭川)에는 길상사(吉祥祠)가 있다. 김유신의 사당으로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이 밖에 김유신을 향사(享祠)하는 곳은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군위(軍威)의 노령사(老齡祠) 또는 숭무전(崇武殿), 강릉(江陵)의 화부사(花浮祠), 광주(光州)의 장렬사(壯烈祠), 금산(錦山)의 구봉사(龜峰祠), 고창(高敞)의 백양사(白羊祠), 부안(扶安)의 개암사(開巖祠), 진양(晋陽)의 남악사(南岳祠), 화성(華城)의 금산사(金山祠), 군산(群山)의 운림사(雲林祠), 김제(金堤)의 벽성서원(碧城書院), 함평(咸平)의 류음사(柳陰祠), 전주(全州)의 완산사(完山私), 扶餘의 부풍사(扶風祠), 무안(務安)의 연계사(蓮溪祠), 정읍(井邑)의 태흥사(泰興祠)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진천군내에는 김유신과 인연이 있는 유적지(遺蹟地)가 여러 곳 있다.
| 키워드 | 김유신, 김춘추, 고구려, 백제, 삼국통일, 알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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