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남수문(南秀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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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신 |
시대/생몰년 | 1408년(태종 8)~1443년(세종 24)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옥천 |
자료출처 | 옥천군지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경질(景質)·경소(景素)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세종 18) 중시문과 을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의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 응교를 제수 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 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을 썼다.
『통감훈의』는 『자치통감』을 보다 잘 읽을 수 있도록 새김말과 뜻을 달아놓은 책을 말한다. 『장감박의』는 중국 역사시대 명장들의 지략 등을 모아 놓은 병서로, 세종 이후로 변방 무장들의 필독서로 사용되었다.
그 뒤 예문관 응교·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경연 검토관을 거쳐, 1442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지고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몇 편의 전(箋)·기·묘지 등이 『동문선????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남수문은 학자답게 집현전에서 숙직을 서다가 사망했다. 그의 나이 36살에 돌연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이 크게 슬퍼했다. 『세종실록』에는 “집현전에서 숙직하던 남수문이 병이 심하므로 내의 두 사람을 보내 구료하였으나 마침내 낫게 하지 못하여 드디어 죽으니, 사림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겼다. 특별히 관곽(棺槨)과 쌀·콩을 아울러 10석, 종이 70권을 부의물로 하사하였다”고 나온다. 저서로는 『경재유고』가 있다.
그의 위패는 1711년(숙종 37)에 지어진 옥천 호계당우(虎溪堂宇)에 모셔져 있고, 묘는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상지동의 덕령산에 위치한다.
키워드 | 고성남씨, 경재, 문장가, 집현전, 경재유고, 호계당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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