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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이사균(李思鈞)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471년(성종 2)∼1536년(중종 31)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시호 문강(文剛)이다.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희(李嘻)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병조참판에 추증된 이계반(李繼潘),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식(李埴),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부평부사에 추증된 김숙(金潚)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임시로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되었다. 1500년 홍문관 정자(正字) 겸 경연전경(經筵典經)에 임명되고, 1503년(연산군 9) 저작․부사과를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에 임명되었다. 150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으면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가 곧 곤양(昆陽)으로 옮겨졌다. 보은에 유배되었을 당시 선조인 익재 이재현의 영정을 모사하여 영당(탄부면 하장리)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부수찬(副修撰)으로 기용되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겸 춘추관 기주관(記注官), 승문원 교리에 임명되었다. 1509년(중종 4)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부응교에 임명되고,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 겸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승문원 참교(參校), 성균관 사성(司成) 겸 지제교, 장악원정(掌樂院正), 승정원 동부승지, 우승지, 장악원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513년(중종 8)에 도승지(都承旨), 1514년 강원도관찰사, 1517년 공조참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17년 겨울에는 중궁책봉주청사(中宮册封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18년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1519년(중종 14)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는데 조광조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1520년 함경감사에 임명되고, 1522년에는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한 번 중국에 다녀왔다. 1523년(중종 18년) 전라감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한성부 판윤, 충청감사, 평안도 절도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호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1535년(중종 30)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 종기를 앓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위독해져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는 ‘등창이 나서 충주의 개관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부음을 들은 중종은 2일간 조회를 폐하고 장례 물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눌헌집(訥軒集)』이 있다.

키워드 경주김씨, 중종반정, 기묘사화, 눌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