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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박삼길(朴三吉)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442(세종 24)∼1509(중종 4)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면천(沔川), 자는 동리(東利), 호는 백비(白扉)이다. 증조부는 박승검(朴承儉), 할아버지는 박유(朴攸), 아버지는 병조참판 박효순(朴孝順), 어머니는 정씨(鄭氏), 부인은 남양홍씨(南梁洪氏)로 홍언수(洪彦修)의 손녀이다. 보은읍 금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알려주어 ‘삼길(三吉)’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남달리 힘이 세고, 활쏘기와 달리기 등이 뛰어났다. 이런 그를 위해 그의 아버지가 비록 장수가 되더라도 글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자 낮에는 사냥하고 밤에는 천 번을 넘게 독서하여 제자백가에 두루 통달하였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에 급제하고 1474년(성종 5)에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렀다. 성종 재위 시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성종이 윤비(尹妃)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장차 사사(賜死)하려 하였는데, 이때 휴가를 청하여 나가지 않고 “우리가 신하되어 왕후로 섬긴지 오래 되었다.”라고 탄식하며 폐비의 죽음을 애처롭게 생각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여 폐비의 일로 추죄(追罪)를 하였으나, 그는 당시 이러한 이유로 조정의 계청(啓請)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연산군이 단상(短喪)의 제도를 정할 당시 아버지의 상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어 왕명을 무시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부임하였다. 부임 이후 비록 관아에서 일을 보았으나 물볼기를 때리지 않았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부인과 따로 방을 정하여 거처하면서 상기를 마쳤다. 회양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하자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떠나가는 길을 막고 목 놓아 울었으며,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 연산군이 은밀히 내관을 보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의 짐 보따리를 조사했더니 약간의 몇 말의 쌀과 간장병 그리고 조복(朝服) 한 벌 뿐이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이 사실을 듣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격시키고, 1504년(연산군 10)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였다. 이후 병조참의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후 연산군이 점점 방탕하고 음란하여 정치가 어려워지자 그는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고 물러나 있었다. 이때 박원종(朴元宗)이 반정(反正)할 것을 상의하자 “임금이 비록 어질지 못하나 대의(大義)는 범할 수 없다.”라고 하며 그날 말에서 떨어졌다는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 부인과 더불어 손수 채소밭을 가꾸어 나물밥과 채소를 먹으며, 자제와 후진을 가르쳤다. 그는 항상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가르침으로 말을 하였으며, 이에 마을의 노인들이 모두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1509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키워드 면천(沔川)박씨, 연산군, 보은읍 금굴리, 수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