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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이련(李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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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9세기 말엽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말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백(景伯), 호는 연옹(然翁)이다. 고려 때 명문신이었던 국당(菊堂) 이천(李蒨)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재관(李在觀)이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학문을 좋아하여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뜻을 두어 향시(鄕試)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지럽자 과거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부친 봉양과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는 살아가며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고, 경학박람(經學博覽)을 학문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관혼상제는 반드시 예법을 따라 행하였으며, 재물에는 욕심이 없었다. 또한 사람을 대할 때는 봄바람과 같이 화창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는 온화하고 화락하였다고 한다.
그는 고을에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나쁜 일은 질책하고 다스렸으며 학문하는 선비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관군과 동학도들이 그의 집을 바라보며 모두 군자선생(君子先生) 댁이라 하여 들어오지 않고 그냥 지나가 무사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군자의 면모를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러 존경하였으며, 때를 잘못 타고 나서 바위 밑의 이름이 되었다고 애석해 했다.
키워드 | 경주이씨, 연옹, 학자, 후학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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