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정열모(鄭烈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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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895(고종 32). 11. 1.∼1967. 8. 14.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일제강점기․현대의 교육자․국어학자로 본관은 장기(長鬐), 호는 백수(白水)이다. 1895년 회인면 중앙리 120-3에서 정해윤(鄭海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경 회인보통공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하여 주시경이 주도한 조선어강습원에서 1912년 3월 중등과(제5회), 1914년 3월에 고등과(제2회)를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후 1916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평안북도에 있는 자성보통학교와 의주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1921년 일본의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고등사범학부 국어한문과에 입학하였으며, 192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에서 조선어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32년 초에 신설된 김천고등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무주임을 거쳐 교장에 취임하여 10년 넘게 재직하였다. 이 시기 조선어사전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43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김천에서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유치된 상태에서 교장직에서 사임하였고, 1944년 9월 30일 공소 소멸로 석방된 후 김천에 칩거하였다.
1945년 해방 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장, 10월 숙명여자전문학교 문과 과장을 지냈으며, 12월 31일에는 통일정권촉성회에도 참여하여 좌우 정당의 합작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1946년 3월 국학전문학교의 초대 교장, 1947년 6월 홍문대학관 관장, 1949년 6월 홍문대학초대 학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같은 시기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한글문화보급회와 신흥국어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1946년 2월 『한글문예독본』을 재간하는 등 한글 보급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을 지지하며 1949년 5월 민족자주연맹 서울시연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는데, 이러한 활동과 관련하여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49년 12월 서울지방검찰청 수사과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1950년 5월에는 김천에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였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납북되었으며, 1955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 언어학교수, 1958년 4월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실 교수, 1964년 4월 사회과학원 후보 원사, 1965년 1월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실 교수와 후보원사 등에 임명되어 왕성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67년 8월 14일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으로는 1929년 『신생(新生)』 9월호에 「주시경과 그 주위의 사람들」을 발표했고, 『조선일보』 1932년 1월 2일자에 「방언 규정(規正)에 노력(努力)이 필요」, 1941년 『조광』 9월호에 「십년」 등을 발표하였다. 저서로 『신편고등국어문법』, 『한글문예독본』, 『신라향가주해』, 『향가연구』, 『조선어 고어역사』 등이 있다.
키워드 | 장기정씨, 백수, 학자, 교육자, 회인면 중앙리, 한글보급운동, 납북, 사회과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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