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보기

명칭 홍윤성(洪允成)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425(세종 7)∼1475(성종 6)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회인(懷仁), 처음 이름은 우성(禹成), 자는 수옹(守翁), 호는 경해(傾海),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증조부는 홍영해(洪延甫), 조부는 홍용(洪容)이며,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홍제년(洪濟年)이다.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교동(校洞, 향교골)에서 출생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고, 무예에 재능이 있어 사복시 주부(主簿)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여 친밀하게 되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는 큰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킬 때 적극 가담 협력하여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에 승진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455년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다. 이해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禮曹叅議)에 임명되고, 세조의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었다. 1456년 참판(參判)에 승진하여 인산군(仁山君)에 봉하여졌다. 1457년(세조 3) 예조판서(禮曹判書)․경상우도절제사가 되고 1459년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모련위(毛憐衛)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1467년(세조 13)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신숙주․한명회 등과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았다. 1469년(예종 1)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470년(성종 1)에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홍윤성은 여섯 임금을 섬기고 세 번이나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른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러나 성질이 호방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권세를 얻은 뒤에는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을 깔보고 오로지 힘과 위세로써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집안의 하인들을 시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그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이라는 이유로 단지 책망만 할 뿐 처벌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정적인 그의 모습은 '동각잡기(東閣雜記)', '부계기문(涪溪記聞)', '기재잡기(寄齋雜記)',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의 회인면 부수리 향교골 탑사리는 홍정승의 집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묘소는 충남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있다.

키워드 회인, 계유정난, 부수리, 경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