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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박계우(朴季愚)
분류 충신
시대/생몰년 1414~1454
형태
언어
지역 영동
자료출처 영동군지

밀양인(密陽人)으로 호가 호악(湖岳)이다. 난계공 연(蘭溪公 奭)의 3자로 태종 14년(1414년) 갑오(甲午)에 태어났으며 단종(端宗) 때 충신(忠臣)이다. 어머니는 여산송씨(彌山宋氏)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빈(斌)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민(英敏)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가정지학(家庭之學)을 전수받아 충효지도(忠孝之道)에 뜻을 두고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지간(天地之間)에 태어나서 집에서는 부자지 인(父子之 仁)에 힘쓰고 관직(官職)에 나아가서는 군신지 의(君臣之 義)에 힘쓸 것이니 인의(仁義)는 오상지강(五常之綱)이요 충효(忠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 인자(人子)로서 마땅히 효친지인(孝親之仁)이요 신하(臣下)로서 마땅히 갈력(竭力)하는 바는 충군지 의(忠君之 義)니 사친사군(事親事君) 할 때 능히 그 성경(誠敬)을 충효(忠孝)의 윤리(倫理)에 다한 즉 가히 몸을 천지간(天地間)에 세워서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공이 일찍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있어 기록(記錄)하여 둔다. 춘조애완 계변난 동석목간 설후송(春朝愛翫 溪邊蘭 冬夕黙看 雪後松)이란 시(詩)에 담긴 뜻을 보면 공의 아담한 정취(情趣)와 늠름(漂漂)한 절개(節槪)를 가히 추상(推想)할 수가 있다. 뜻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 자신의 영화(榮華)와 이해는 돌보지 않고 충성(忠誠)과 절개(節槪)로써 살았다. 공은 세종(世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集賢殿 翰林學士)를 역임하여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진(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이개(李塏) 등 제절사(諸節士)들과 도의지 의(道義之 義)를 맺고 충의지 의(忠義之 義)를 다져 단종조(端宗朝)의 계유정난(癸酉靖難)(端宗元年 1453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고명(顧命)받은 동지들과 더불어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으며 갖은 고문(持問)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르면서도 추호의 변함이 없이 형장(刑場)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실로 천일(天日)의 수감(垂鑑)이요 광세(廣世)의 조폭(照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숙종(肅宗) 때 신원(伸寃)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 吏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영월장능창절사(越莊陵彰節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위(配位)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그의 이름이 소비(小非)로서 부군(府君)이 순절함에 예조참판 홍윤성(禮曹參判 洪允成)의 집 노비(奴婢)로 사급(賜給)되었다. 부군(府君)이 신원(伸寃)됨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증서(贈敍) 되었다.

키워드 박계우, 박연, 단종, 계유정난, 순절, 영월장능창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