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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신미대사(信眉大師)
분류 승려
시대/생몰년 1403(태종 3)∼?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선승(禪僧)으로 본관은 영동(永同),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다. 고조(高祖)는 김령이(金令貽), 증조(曾祖)는 김길원(金吉元), 할아버지는 김종경(金宗敬), 아버지는 조선 태종 때 좌동시학(左同侍學)에 제수되어 원자(元子)의 학문을 보필하던 김훈(金訓)이다. 대대로 영동에 기거해 왔다는 그의 가문은 고조 김령이가 고려 때 영산군(永山君)에 추봉(追封)되고, 증조인 김길원이 공을 세워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지며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여 이후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영산(永山, 영동)으로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여흥이씨(驪興李氏)는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딸로 축발(祝髮)하고 여승[尼]이 되었다고 한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동생은 유생이면서도 숭불을 주장했던 김수온(金守溫)이다. 효령대군 등의 귀의를 받아 왕실에 대한 불교 전파에 힘썼던 선승 행호(行乎)의 문도였다.

신미대사가 어느 절로 출가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도갑사(道甲寺) ‘묘각화상비문(妙覺畵像比文)’에 기록한 수미(守眉)의 행적에서 신미대사의 자취를 볼 수 있다. ‘묘각화상비문’에는 수미대사가 법주사(法住寺)에서 ‘사미(沙彌) 신미를 만나 의기투합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사미(沙彌)는 십계(十戒)를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위하여 수행하고 있는 어린 남자 중을 일컫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신미는 젊은 시절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를 하였거나, 다른 절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도 적어도 법주사에서 수행시기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신미대사는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혔다.

1446년(세종 28) 수양대군이'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할 때 자문을 하였으며, 1448년(세종 30) 대자암(大慈庵) 주지로 내불당 조성에 참여하였다. 1450년에는 효령대군 사저에 거처하며 병환 중인 세종에게 설법하는 등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불사를 중흥시켰다. 세종은 말년에 두 왕자와 왕후를 3년 사이에 잃게 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신불(信佛)하였다. 이때 신미와 김수온은 세종을 도와 내원당(內願堂)을 궁 안에 짓고 법요(法要)를 주관하는 등 불교를 일으키기에 노력하였다.

다음 왕인 문종은 선왕의 뜻을 이어 그를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에 임명하였다. 이때 복천사(福泉寺)를 중수하고 그곳에 안평대군이 모셔온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미대사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신미대사는 1458년(세조 4)에 국가에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고자 했을 때 이를 감독하였고, 1461년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했을 때는 그 수장으로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불전(佛典)을 번역, 간행하였다. 이때 그의 주관 아래 '법화경', '반야심경', '영가집(永嘉集)' 등이 언해되었으며, 함허(涵虛)의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도 교정하여 간행하는 등 불전의 국역과 유통을 위한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1464년 2월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로 행차하였을 때 그곳에서 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과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또한 같은 해에 상원사(上院寺)로 옮겨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하였고, 이에 왕은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을 지어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신미대사의 정확한 입적 일자는 전하지 않지만,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 동쪽에 있는 그의 부도탑인 ‘수암화상탑(秀庵和尙塔)’에 새겨진 ‘성화십육년팔월일입(成化十六年八月日立)’이라는 명문을 근거로 하여 1480년(성종 11)으로 추정된다. 신미대사에 관한 문헌 기록은 1479년(성종 10)의 것이 마지막이므로 1479년에서 1480년 8월 사이에 복천암에서 입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수암화상탑에 지대석이 생략되는 등 공사를 서두른 흔적으로 보아 성종 11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수암화상탑(秀庵和尙塔)’은 2004년 10월 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키워드 영동김씨, 김수성,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