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이정렬(李貞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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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문신 |
시대/생몰년 | 1868(고종5)∼1950.2.27.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군서(君瑞), 호는 퇴호(退湖)이다. 할아버지는 판관 이원집(李源集), 생부는 이철인(李哲仁), 생모 영산신씨(靈山辛氏)로 신익근(辛益根)의 딸이다. 10세에 문정공(文正公) 이간(李柬)의 5세손인 이상규(李相逵)의 양자로 갔다. 이상규는 명성왕후의 이종사촌이다. 이때 고향 구인리를 떠나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부인은 고령박씨(高靈朴氏)로 박영목(朴永穆)의 딸이다.
1866년(고종 23) 명성황후의 입사 제의로 19세에 돈령부 참봉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그해 친부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888년 시묘를 마친 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며 1889년 감시 초시에 입격하고, 1891년(고종 28)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가주서․홍문관 부정자에 제수되었으며, 1895년 시종원(侍從院) 비서감(秘書監) 우비서랑(右秘書郞)을 비롯해 홍문관 시독관․중추원 의관(議官)․규장각 직각(直閣)에 제수되었다. 1899년(광무 3) 비서원 비서승에 오른 이후 태의원(太醫院)의 소경(小卿), 비서원승(秘書院丞), 봉상사부제학(奉常司副提調)․규장각직학사(奎章閣直學士)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1901년 일본과 강제로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사법권을 강탈당하자 협상 주체자를 탄핵하였으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이때 고종이 영친왕에게 “퇴호거사(退湖居士) 일심사군(一心事君)” 여덟 자를 쓰게 하여 하사하면서 귀향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1903년에 다시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되어 취임하였고, 1908년 고종이 강제로 선위되자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로 낙향하여 평생을 보냈다.
시사의 여러 문제에 직간을 서슴치 않는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었으며, 저서로 『퇴호유고(退湖遺稿)』가 있다.
키워드 | 예안이씨, 퇴호, 문신, 퇴호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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