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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송병례(宋秉禮)
분류 독지가
시대/생몰년 1852(철종 3)∼1906(광무 10)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말기의 독지가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순팔(順八), 호는 하추(霞椎)이다. 세한재(世寒齎) 송시도(宋時燾)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송지수(宋止洙)이다.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학행이 탁월하여 22세에 감역(監役)이 되었는데 당시 어지러운 정국을 보고 사임, 귀향하여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구휼사업에 힘을 기울여 매년 춘궁기가 되면 수백 석의 양곡을 빈민에게 나눠주었고 추수기에는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감해주며 마을 사람의 교화시켰다. 이에 도적들도 송감역(宋監役) 댁에는 침범하지 말자고까지 했다고 한다. 갑오동학혁명 때는 교도들이 장안면 장내리로 집결 도중 삼승면 원남리에 1주일간 체류하면서 악덕 인사와 악덕 지주가 모두 체포하여 가두니 민생이 도탄에 빠졌는데 이 때 그는 태연히 그 수령을 의(義)로 설득하여 갇힌 자들을 구하고 도리어 관대한 예로 대접받았다.

평소 집에 있으면서는 매우 검소하였으나 남을 대접할 때는 매우 관대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906년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 날 찾아온 조객이 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1910년 삼승면 원남리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키워드 은진송씨, 하추, 학문 연구, 구휼, 삼승면 원남리 송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