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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양주승(梁柱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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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848(헌종 14)∼1911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말기의 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소(擎霄), 호는 금화(金華)․심재(沈齋)이다. 문양공(文養公)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양종대(梁鍾大), 아버지는 금계(金溪) 양효수(孝斅洙)이다.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의 문인으로 학문에 힘써 이름을 얻었다.
타고난 품성이 크고 풍부하며 도량이 엄각(儼慤)하였다. 회남면 금곡리에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학문을 익히며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등과 교우하였다.
동문인 호산과 함께 어당의 옛터에 추양사(秋陽祠)를 창건하여 스승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붕로회(朋老會)를 만들어 학문을 닦으며 강습(講習)하였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는 국치를 당하자 문을 닫고 집에만 칩거하다가 걱정하고 분하게 여김이 병이 되어 1911년 1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1931년에 향리(鄕里) 유림들에 의하여 문목공(文穆公)으로 사시(私諡)되고 추양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금화집(金華集)』 5권이 있다.
키워드 | 남원양씨, 금화, 심재, 송석정, 추양사, 후학 양성, 금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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