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 이세보(李世輔) |
---|---|
분류 | 문신 |
시대/생몰년 | 1832(순조 32)∼1895(고종 32)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시조 작가로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인응(寅應), 자는 좌보(左輔)이다. 능원대군(綾原大君)의 8대손이며, 증조는 이복현(李復鉉), 할아버지는 이제로(李濟魯), 아버지는 군수 이단화(李端和),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윤응선(尹應善)의 딸이다. 부인은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이긍연(李兢淵)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풍계군(豊溪君) 이당(李瑭)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소의대부(昭義大夫) 종2품 경평군(慶平君)의 작호를 받았다. 이어 중의대부(中義大夫)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이어서 승헌대부(承憲大夫)·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됐다. 1852년에 의덕대부(宜德大夫), 1853년 정1품인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어 감선(監膳)에 임명되었다.
1857년(철종 8)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가 되어 부사인 호조참판 임백수(任百秀)와 서장관(書狀官)인 김창수(金昌秀)를 대동하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0년 외척 세도가의 미움을 받아 강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고종 즉위년인 1863년에 조대비(趙大妃)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석방됐다.
1865년(고종 2)부총관으로 벼슬을 다시 시작해 한성부우윤·한성부좌윤, 1866년(고종 3)에 병조참판․동지돈녕부사․형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고, 1869년(고종 6)에는 호조참판, 이어 다시 부총관이 됐다. 그 후에는 여주목사·오위도총부·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어 1894년(고종 31)까지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다섯 차례의 공조판서, 여섯 차례의 판의금부사, 두 차례의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459수의 시조 작품을 후세에 남겨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보은군 탄부면 평각리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것이 알려지고 있으며, 그가 남긴 시조 중 속리산을 배경으로한 시조가 다수 발굴되고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곤령전(坤寧殿)에서 피살되는 변을 당하자 통곡하다 병이 되어 같은 해 11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여러번 이장되었는데, 현재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화정리에 있으며, 저서로는 『풍아(風雅)』․『시가(詩歌)』․『별풍아 別風雅』․『신도일록』 등이 전한다.
키워드 | 전주이씨, 인응, 좌보, 시조 작가, 풍아, 시가 별풍아, 신도일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