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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이상수(李象秀)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820(순조 20)∼1882(고종 19)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인(汝人), 호는 어당(峿堂),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선 정종(定宗)의 열 번째 왕자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며, 대대로 경기도 파주(坡州)에 새거한 노론(老論)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옛 회인현(懷仁縣) 내 이름 높던 선비 아홉인 죽계구로(竹溪九老) 중 한 사람인 이연주(李演周)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며, 부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이정하(李靖夏)의 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몸이 허약하였으나 매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2살이 되어서는 칠서(七書)를 독파하였으며 율시작법(律詩作法)에 익숙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15세에 상경하여 백효승(白孝承)과 함께 그의 아버지 매원(梅園) 백주진(白周鎭)에게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공경(公卿), 명사(名士)를 찾아 부탁하여 계속 공부를 이어가 학문을 성취하였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1851년(철종 2)에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파주에서 회인현 남면 추동(楸洞 : 현재의 보은군 회남면 신추리)으로 이거하였으며, 50세까지 20년간 이곳에서 살면서 강학(講學)활동을 하면서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내 회인현에 유풍(儒風)을 진작시켰다. 51세에 청주(淸州) 연제(蓮堤 : 강외면 연제리)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도 학동을 모아 교육을 하며 회인의 제자들을 돌보는 생활을 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862년(고종13) 임술민란(壬戌民亂) 뒤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를 올렸다. 1864년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종의(宗誼)를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종실(宗室)의 자제를 발탁할 때 아버지가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진사가 된 것에 만족하고 아버지를 봉양할 뜻을 보이자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1879년(고종 16) 학행으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고, 이어 문학과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계운(溪雲) 김낙현(金洛鉉)과 함께 경연관 겸 서연관(經筵官兼書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았다. 1882년(고종 19) 다시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제수 받았으나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았으며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상소와 실학(實學)과 실사(實事)에 힘쓸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그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의 학통을 전수 받았으며 구방심(求放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여 평생 「출사표(出師表)」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암송하였다. 동문으로 민상호(閔象鎬), 성기운(成岐運), 서응순(徐應淳) 등이 있고 임헌회(任憲晦)와도 교우하였으며, 윤정현(尹定鉉), 신헌(申櫶)과 같은 노론인사들과도 친숙하였다.

그는 1883년 63세의 나이로 청주 연제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다음해 2월 공주 구즉면에 묻혔다. 1910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으며 그가 살았던 옛터에 제자들이 추양정사(秋陽精舍)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해오다가 지금은 회남면 금곡리 마을 입구로 이건하였다. 저서로는 『어당집(峿堂集)』, 『어당속집(峿堂續集)』, 『남명사정강(南明史正綱)』, 『몽유(蒙牖)』가 있고 가사 작품으로 「금강별곡(金剛別曲)」, 「경화장관(京華壯觀)」이 있다. 그의 문장과 시작(詩作)은 『금강승람(金剛勝覽)』,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에 수록되어 있고, 『어당집』에 수록되어 있는 「발몽정궤(發蒙正軌)」에 보면 학문을 함에 있어 문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갱신고(更辛苦)’, ‘순승법(循繩法)’과 같은 독특한 교수법을 창안하였다.

키워드 전주이씨, 어당, 문간, 회남면 금곡리, 어당집, 어당속집, 남명사정강, 몽유, 금강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