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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김낙현(金洛鉉)
분류 문신
시대/생몰년 1817(순조 17)∼1892(고종 29)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정여(定汝), 호는 계운(溪雲),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증조는 정언(正言) 김상도(金相度), 할아버지는 김기춘(金箕春), 아버지는 도정(都正) 김재진(金在晉),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심응규(沈應奎)의 딸이다. 부인은 남양홍씨로 군수 홍재과(洪在果)의 딸이며,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의 간정(簡靜)함이 어른과 같았고, 자라면서 경전(經典)에 뜻을 두고 문장을 닦아 주위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명예와 이익에는 관심이 없어 당시 재상이 자신을 위해 그를 끌어들여 쓰고자 하였으나 공손히 거절하고 스승을 찾아 다니고 벗을 사귀며 문학(文學)에 힘을 쏟았다.

1859년(철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864년(고종 1) 정릉참봉(靖陵參奉), 1866년 금부도사(禁府都事)․의영고(義盈庫) 봉사, 1867년 사포서직장(司圃署直長),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지냈고, 1869년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다.다. 1873년 돈녕부(敦寧府) 주부(主簿)․사직서(社稷署) 경릉령(敬陵令)에 임명되었으며, 1875년(고종 12)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부임하여 화재와 가뭄으로 피해를 입은 고을을 잘 다스리려 암행어사가 그 치적이 여러 군 가운데 최고라고 보고하였다. 1878년 삭령군수(朔寧郡守)로 부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홍산현감(鴻山縣監)에 부임하여서는 고을의 세금 문제를 잘 처리하여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후 보은 속리면 삼계리에 내려와 지낸 것으로 보인다. 1880년(고종 17) 학행으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겸 경연관(經筵官) 서연관(書筵官)․시강원(侍講院) 진선(進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882년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이후 나라의 실정을 논하고 선정(善政)을 청하는 상소, 1884년 옛 의복 제도를 보존할 것을 청하는 상소 등을 올렸다. 나라에서는 계속 그의 출사를 명하여 1886년(고종 23) 공조참판, 188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1891년 동지돈녕부사, 1892년 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892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초상에 드는 비용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교우가 깊어 왕복서신에는 성리학에 관한 깊이 있는 논란이 있어 그의 학문적 경향을 알 수 있다. 저서로 『계운유고(溪雲遺稿)』가 있으며, 묘소는 보은읍 강신리에 있다.

키워드 광산김씨, 정여, 계운, 문경, 홍직필, 유신환, 전우, 계운유고, 보은읍 강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