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보기

명칭 자정자안(慈淨子安)
분류 승려
시대/생몰년 1240(고려 고종 27)∼1327(고려 충숙왕14)
형태
언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자정국존비명(慈淨國尊碑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은군지????(1970), 보은군지(1994)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으로 속리산 법주사 주지를 지냈다.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본관은 일선군(一善郡)이다. 이름은 자안(子安)이며, 뒤에 꿈에 감응하여 미수(彌授)로 고쳤다. 시호는 자정국존(慈淨國尊), 탑호(塔號)를 보명(普明)이다. 아버지는 김한제(金漢磾)로 봉순대부(奉順大夫) 전객령(典客令)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어머니는 문공진(文公進)의 딸로 화의군부인(和義郡夫人)으로 추봉되었다. 태어난 지 수일이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누이에 의해 자랐다. 9세에 스승에게 나아가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한번 들으면 모두 암송하였을 정도로 총명하고 영민함이 뛰어났다. 13세 때 원흥사(元興寺)의 종연(宗然) 문하에 들어가 중이 되어 구족계(具足戒)(구족계(具足戒) : 불교 교단의 승려 중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 모든 계율이 완전히 구비되었다 하여 구족계라 하며, 이를 잘 지키면 열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를 받고 경론(經論)을 익혔다. 1258년(고종 45) 19세에 선불장(選佛場)에 나가 상품과(上品科)로 급제하여 국녕사(國寧寺)에 머물렀다. 1268년(원종 9)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 고려시대에 있었던 승려 법계(法階)의 하나. 국가에서 실시한 승과(僧科)의 대선(大選)에 합격하면 대덕(大德)이 되고, 그 뒤 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의 법계에 이르게 된다. 삼중대사 위의 법계는 선종의 경우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에 이르게 되며, 교종의 경우 수좌(首座)→승통(僧統)에 이르게 된다. 이 삼중대사 이상은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가 되어 “유식론(唯識論)”을 강론하니 원종(圓宗) 원종(圓宗) : 교의(敎義)가 원만(圓滿)한 대승(大乘)의 종파라는 뜻인데, 보통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이 스스로 원종 혹은 원교(圓敎)라고 칭한다. 의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선사들이 모두 그 앞에 경서를 펴니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라고 감탄하였다. 이로써 자안(子安)은 젊은 나이에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어 당시 불교의 교의(敎義)를 어깨에 짊어져서 당대의 표준이 되었는데 그처럼 삼중대사로서 주법(主法)한 일은 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 뒤 웅신사(熊神寺)에 머물 때 수좌(首座)가 되었고, 장의사(莊義寺)에 머물 때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 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다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려 하산하였다. 이때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이 장소(章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글)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켜 후진들을 일깨워 계몽토록 하라는 왕명을 전달하였다. 왕명을 받은 이후로 항상 손에 책을 놓지 않고, 쉬지 않고 강론하며 92권의 경론을 해설하였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5월에 중흥사(重興寺)에 머물 때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의 직위와 원명대사(圓明大師)라는 칭호를 받았다. 유가사(瑜加寺) 주지로 있을 때 임금이 연경(燕京)에 있었는데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더욱 깊이 믿어 같이 있는 신료(臣僚)들에게 항상 밤이 되면 외우도록 하여 임금과 일행이 모두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외웠다. 어느 날 중국의 강주(講主, 경문(經文)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법사(法師))가 법화경(法華經) 신해품(信解品)의 어려운 해석을 청하였는데 모든 강사들이 해석할 자가 없다고 하자 임금이 자안에게 사신을 보내어 신해품의 해석과 심지관경(心地觀經)의 저술을 청하였다. 이에 곧 해석과 심지관경을 사신편에 봉헌하니 여러 강사들이 보고 다투던 것을 그치고 서로 찬미하며 그의 뛰어난 식견에 탄복하였다. 임금 또한 마음속으로 더욱 믿고 존경하게 되었다. 1308년(충렬왕 복위 10) 4월 다시 장의사에 머물 때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개내삼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 대장의사주지(大莊義寺住持)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 광지묘변(廣智妙辯) 불각보명대사(佛覺普明大師)로 삼는다는 비답이 내렸다. 1309년(충선왕 복위 원년)에는 숭교원교학(崇敎院敎學)이 되었고, 1313년(충선왕 복위 5)에는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 보리살타(普提薩埵) 마사나가(摩詞那伽) 국일대사國一大師) 우세군(祐世君)으로 삼는다는 비답이 내렸으며, 특별히 일품(一品)의 봉록(俸祿)을 주었다. 1314년(충숙왕 원년) 1월 연경궁(延慶宮)에서 백팔만 승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손수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라는 도장을 새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1315년에는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 삼학법주(三學法主) 덕혜원증(德慧圓證) 잠통현변(箴通玄辯) 국일대사(國一大師)로 봉해졌다. 임금은 참회부(慘悔府)를 세우고 특별히 은으로 도장을 만들어 주어 그에게 승정(僧政)을 전담하게 하니 비로소 오교(五敎)와 이종(二宗)의 차이를 함께 절에서 상의하게 되었다. 1317년(충숙왕 4)에는 불해증원홍자광지대도사(佛海證圓弘慈廣智大導師)로 봉해졌으며, 이듬해는 임금을 대민천사(大旻天寺) 강원(講院)으로 맞이하여 법상종(法相宗) 3대가(三大家)의 장소(章疏)를 강론하였다. 1321년(충숙왕 8) 동화사에 머물렀으며, 1324년(충숙왕 11)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竗圓無礙國尊)에 숭봉되었고, 1325년 다시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렀다. 1327년(충숙왕 17) 12월 초하루에 방을 청소하게 하고 임금에게 올릴 편지를 써 봉인(封印)하여, 상주목사 김영후(金永煦)에게 거듭 싸서 부치고는 오후 4시쯤 조용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당시 향년 88세, 법랍(法臘)은 75세였다. 8일 저녁 법주사의 서북쪽에서 다비식(茶毗式)을 거행하고, 탑을 산호전 동쪽 모퉁이에 세웠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임금이 애통해 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뒷일을 보살피게 하고,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자정국존비명(慈淨國尊碑銘)>에 따르면, 그는 사람됨이 소탈하여 꾸밈이 없었고 본성이 후덕하여, 18년간 중흥사(重興寺)의 주지를 맡으면서도 요청이 없으면 한 번도 권세가의 집에 가지 않았다. 또한 매일 경서 연구와 경론(經論)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항상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방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따르고 안개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는 법상종(法相宗)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유(儒), 불(佛), 선(仙) 3가에 모두 정통하여 비교 강의까지 한 위대한 학승(學僧)이었으며 당시의 승단(僧團)을 지도하던 확고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입적한 후 법주사에 비와 탑을 세웠으나 현재 부도탑은 없고 다만 비석만 남아있다. 자정국존비는 법주사 수정봉 입구에 바위를 파내고 대리석 비석돌을 끼워 넣은 이색적인 비석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탑은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보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깨뜨려 부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키워드 속리산, 법주사, 고승, 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