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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박래영(朴來榮)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796(정조 20)∼1870(고종 7)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성필(聖弼), 호는 송담(松潭)이다. 할아버지는 서청(西靑) 박성혼(朴性渾), 아버지는 옥산(玉山) 박명신(朴命新)이다. 회인 눌곡리에 거주하였으며, 회인 죽계구로(竹溪九老)의 1인이다.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민첩하고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 났으며, 아이 때에 과문(科文)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독서에 전념하여 학문을 대성시켰다. 그가 이미 백수(白首)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 박명신이 아직 건강하여 고을의 시회(詩會)가 열리면 아들 박기일(朴基一), 손자 박봉호(朴鳳鎬)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참석하여 시를 제출하면 주위에서 모두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62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예에 따라 장례를 모시고, 제삿날이 돌아오면 반드시 3일간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근신하였다. 또한 묘소가 10리나 떨어진 준령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성묘를 하였다 한다. 그의 부인 신씨(辛氏) 또한 어진 남편의 부인답게 손님 접대에 공손하였고 시누이 하나가 일찍 자식 없이 남편을 잃고 친정에 와 30년을 살았는데 시종 말없이 살펴주어 이웃의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 '송담유고(松潭遺稿)'가 있고 아들 박기일(朴基一)은 학문을 대성하여 사람들이 ‘하정처사(荷亭處士)’라 불렀다.

키워드 영해박씨, 성필, 송담, 회인 죽계구로, 송담유고